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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는 심상찮은 기세로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하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본 것도 같은데. 이상하지, 눈부시게 환한 날씨가 어쩐지 아쉽다. 때로는 밝은 햇살보다 어두운 빗속에 갇히고 싶은 날이 있는 걸까. 비가, 혼자 있음의 정당한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202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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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해. 왜 나는 네가 아니고 나인지. 왜 나는 내 몸과 내 마음이어야 하는지. 왜 나는 너의 몸과 너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는지. 그러니까 왜 내가 나여야만 하는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무덤덤해진 저 문장이 왜 이렇게 사무치는지.(202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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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을 완독 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과 함께 다음 책으로 건너가는 순간이 주는 기쁨 또한 있다. 그와 더불어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이 내게 말을 건네려고 한다는 착각에서 오는 기쁨과 그 말을 내가 어떤 식으로든 적으려고 노력하는데서 오는 기쁨 또한 있다. 문학만큼 착각이 자유로운 곳도 없으므로. 나는 그 자유를 양심의 가책 없이 마음껏 누리는 것이다.(202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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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어떤 모름은 힘이 되고, 오직 그 시절에만 쓸 수 있는 글도 있다는 걸" (김애란, 최인호청년문화상 수상 소감 중에서)
좋아하는 작가지만, 무슨 상을 받았는지 일일이 찾아보지 않는 나로서는, 뒤늦은 이런 수상 소감을 읽는 일은 마치 선물 같다. '청년 작가'인 챗GPT와 작가가 나눈 '문학적인' 대화도 인상적이다. 새삼 알려준 (익명의) 당신이 고맙다. 여기가 아니라면 내가 어찌 이 글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20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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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는 이 비는 뭘까. 폭포 소리같기도 하다. 비가 들어오든 말든 창문을 그대로 열어두었다. 빗소리가 시원하다. 그런데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그쳐버렸다!(202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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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도서전이 오늘 개막했다는 걸 트위터로 접한다. 트위터리안들이 찍은 사진들을 보며 현장의 분위기를 짐작해 본다. 문득 책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고. 도서전에 모인 수많은 인파를 보며, 우리나라의 독서율이 낮다는 건 거짓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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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 잠시 머리를 식히러 사무실 밖에 나왔다가 참새의 사체를 보았다. 머리 위로는 무수한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다는 것일까. 그런데 왜 참새는 그곳에 아무런 충격의 흔적도 없이, 조용히, 잠을 자듯, 죽어 있는 걸까.(202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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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 적대를, 다정함보다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
-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중에서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바로 안다. 적대는 아무리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적대적인 본성을 숨기지 못하는 법이니까. 사회생활의 대부분은 상냥한 적대로 이루어져 있으니까.(202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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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하지(夏至)였구나. 오후라고 하기엔 너무 늦은, 저녁 일곱 시를 훌쩍 넘긴 시간. 원두를 사러 나갔다 오는 길에, 문득 드는 이 아쉬움의 정체는 낮이 길어져서인지, 밤이 짧아져서인지, 아님 일요일의 저녁이 속절없이 가고 있기 때문인지.(202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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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독서모임의 책이 『작별하지 않는다』였다. 당연하게도 4.3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그보다도 내가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처음보다 훨씬 깊게 빠져들면서 읽었다는 것. 내가 마치 경하가 된 듯, 눈으로 둘러싸인 제주의 집에 있는 듯이. 이것은 무척 새롭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런 내면의 경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모임이 끝나고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던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세상에는 한 권의 책을 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읽은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들의 내면의 경이는 또 어떠할 것인가.(202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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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주의보라는 재난 문자가 오는 마당에 나는 왜 감기에 걸린 것일까? 사무실의 에어컨은 선풍기보다 못한데.(202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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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여주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까. 진심으로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건.(202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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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만히 있어도 덥다고 느끼는 날씨다. 피부에 얇은 액체막이 생긴다. 보호막이라고 하기엔 끈적이고 불쾌한. 아, 이게 여름이었지, 새삼 깨닫는다. 이상하게 피아노 연주가 듣고 싶어서, 오랜만에 쇼팽을 틀어놓았다. 이 더위를, 이 끈적임을 저 청량한 피아노 소리가 튕겨주기라 할 것처럼.(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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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힘들 때는 타인의 마음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감기 기운 때문에 온몸이 나른하고, 생각의 전환이 느리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고, 그는 다른 누군가에게 전화해 주기를 바랐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 몸과 마음이 지금 내게서 벗어나 있는걸. 속이 상할 때는 속 상해할 시간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마음이 다쳤을 때는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시기가 있는 것이다. 그 시기를 벗어나야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다. 아직은 그 시기를 지나지 않았을 거라고, 아마도 그럴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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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한 여름밤의 열어놓은 창밖으로, 아이들의 웃음인지, 비명인지, 괴성인지 모를 왁자지껄한 소리가 한바탕 들렸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파도처럼, 마치 환청처럼.(2025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