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고요한 읽기》, 문학동네, 2024.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고,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생각은 어떤 문장의 작용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니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끌려나와 모습을 보이기까지 그 생각이 내 안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테니까요.(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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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똑바로 계속 걸으면 세상의 끝에 닿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고 믿었다. 세상이 평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바로 계속 걸으면 언젠가 출발한 자리로 돌아온다는 걸, 세상이 둥글다는 걸 알고 있는 우리는 안다. 둥근 지구에 사는 우리에게는 출발점이 곧 도착점이다. 끝은 시작에 있다. 등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다. 등뒤에 있는 사람을 만나려면 한없이 걸어 끝까지, 세상의 끝까지 가야 한다.
등뒤에 있는 사람이라고? 아니다. 끝에 가서 만나게 되는 사람은 그 '등'을 가진 사람, 자기 자신이다. 끝까지 가는 사람은 출발한 자리로 돌아온다. 끝이 시작에 있다. 그러니까 출발한 사람은 끝에 이르러 만날 사람과 동일인이다. '세상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나다. 그가 나다. 나는 나에게서 가장 멀리 있다. 나는 나의 '세상의 끝'이다. '나'는 끝에 가서야 만날 수 있는 아주 먼 대상이다.(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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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있는 것)을 보려면 당연히 눈을 떠야 하고, 안(에 있는 것)을 보려면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아야 한다.(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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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내부, 즉 '나'만 빼고 다 발견한다. 나는 '나'만 빼고 다 규정한다. '나'를 보는, 볼 수 있는 눈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신의 눈에 의해서(만) 발견된다. 그것은 세상의 끝에서만 가능하다. 세상의 끝에 이르기 전에 '나'는 결코 발견/발각되지 않는다. 그 전에는 '나'가 결코 시간/신의 눈을 용납하기 않기 때문이다.(2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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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벌거벗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겨지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능동의 형태를 띤 이 동사 '고백하다'에 자발적인 성격은 거의 없다. 고백하는 사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이다.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까지 고백하지 않는다. 고백은 어렵고, 거의 불가능하고, 그러므로 일단 행해진 고백은 천하만한 무게를 지닌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지 않은 사람이 하는 고백, 이른바 자발적인 고백에는 자랑의 성격이 섞여 있을 것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 자랑이다. 자랑하기 위해 고백할 수 없다. 어떤 고백도 자랑이 될 수 없다.(2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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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점이 시작점이다. 그러나 시작점이 도착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출발하지 않고 도착할 수는 없다. 출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시작점만 있을 뿐 도착점은 없다. 아니, 그에게는 시작점도 없다. 아직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발해서 도착한 사람만이 도착점을 가진다. 출발해서 도착한 사람에게만 도착점이 시작점이 된다. 이때 시작점은 도착 이후의 시작점이다. 그는 시적점으로 돌아왔지만, 원래 있던 자리로 단순히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자리에 새로 선 것이다. 자리는 같지만 그 자리는 같은 자리가 아니다.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도착한 자로서 시작점에 섰다. 그는 세상의 끝까지 갔고, 거기서 시간/신, 즉 '나'에 의해 발각되었고, 발각되어 벌거벗겨짐(고백됨)의 상태에 이르렀고, 그러므로 그는 다른 그다. 고백한 사람은 고백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무엇을 고백했느냐는 부차적이다. 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고백한 사실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30~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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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으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그것이 그의 운명이다. 자유와 운명이 한 단어라는 것은 그런 뜻이다.(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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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에 의지해서 자동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의 지난한 수고의 과정 속으로 영감이, 은총처럼 임한다.(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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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에 대한 미신에서 벗어날 것. 영감을 부정하지도 말고 숭배하지도 말 것. 왜곡이나 악용은 더욱 삼갈 것. 모독하지 말 것. 다만 필사적으로 '꿈꿀' 것. 영감 같은 것은 있지 않다는 듯, 그러니 바라지 않는다는 듯 필사적으로 애쓰고, 애쓰면서 기다릴 것. 기다리면서 초대할 것. 애씀이 초대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 것. 그조차 알지 말 것. 행여라도 영감이 자신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은총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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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는 떠났으나 아직 이르지 못한 자, 이르지 못해 떠도는 자를 찾아온다. 혹은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다. 떠났으나 아직 이르지 못한 자, 떠도는 자는 그 불완전한 존재의 상태를 견디기 위해 향수를 불러오고 향수에 매달린다. 향수에 의지해서 산다.(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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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판단하는 자는 우선 아는 자이다. 알지 않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런 불가능한 일을 자행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것에 근거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예를 들면 맹목적 신념.)(6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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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알려고 하는 열망이 사라진다. 더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함부로 하려는 유혹에 빠진다.(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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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그리움이 해소된 뒤에도 그리움의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란다. 그리움은 계속 그리워하기 위해 알지 못하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울퉁불퉁한 감정에서 놓여난 안도감이 잠시인 것은 그래서이다.(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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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바다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 너머를 보는 사람은 바다 너머 저쪽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곳은 그가 모르는 곳이다. 모르는 세계를 향한 이 그리움은 무엇일까. 모르는 곳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가능할까.(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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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키스의 순간에, 첫 키스와 함께 사랑이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스며든다고.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영원을 꿈꾸기 때문에 생긴다. 사랑이 시작될 때 불안이 시작되는 것은 사랑이 기본적으로 영원을 향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영원을 담보로 하는 모험이 사랑이기 때문이다.(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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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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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차별은 나름의 합리적 논리를 그 안에, 주로 궤변의 방식으로, 튼튼하게 무장하고 있어서 깨뜨리기가 어렵다. 그 안에서 지내는 사람에게 적에 대한 혐오나 조롱의 말은 그와 그의 동료들의 사기를 북돋울지언정 허물로 지적되지 않는다. 장려될지언정 제어되지 않는다. 반성과 성찰은 그 논리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이루어지지 않는데, 합리적 설득을 통해 그 튼튼한 논리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불합리한 충동이며 부조리한 일격인 사랑밖에 없다.(105~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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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삶의 일부가 아니라, 기다림이 곧 삶이다. 그들은 어떤 삶을 기다리지만, 실은 어떤 삶을 기다리는, 그것이 곧 삶이다. 기다리면서 일생을 산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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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만큼 오리라는 사실이 확실한 것은 없다. 죽음만큼 오리라는 사실이 확실하면서도 언제 올지 확실하지 않은 것도 없다. 죽음이 오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고, 죽음이 언제 올지는 확신할 수 없다. 죽음만큼 지연되고 연기되는 것은 없다. 죽음만큼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도 없다. 대개 죽음은 지연되고 연기되지만, 그러나 죽음이 닥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다.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은 순간에 죽음은 온다. 죽음은 게으르고, 동시에 즉흥적이다. 요컨대 종잡을 수 없다. 죽음은 올 때까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져도 언젠가는 온다. 늦어질 뿐 철회되지 않는다. 죽음은 신실해서 온다는 약속을 파기하지 않는다. 다만 오는 시간을 우리가 모를 뿐이다.(128~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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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큰 질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오는 깨달음은 질문의 형식으로 온다. 죽음은, 유일한 질문이다. 삶의 모든 경험이 바쳐져서 만들어낸 단 하나의 질문이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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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염려와 걱정이 꿈이 된다. 욕망과 그리움이 꿈이 된다. 무엇을 되풀이 생각함으로써 사람은 붙잡힌다.(138~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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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꿈으로 나타나고, 꿈은 생각으로 이어져 현실을 간섭한다. 꿈은 현실과 이런 식으로 연결된다. 이런 식으로 현실은 꿈에 작용하고, 꿈은 현실에 작용한다.(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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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붙들리지 말 것. 꿈으로 삶을 재단하려 하지 말 것. 꿈의 해석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 것. 꿈이 창의적으로, 자의적으로, 그러니까 우연에 의해 해석된다는 사실을 인지할 것. 꿈은 내가 꾸어도 그 꿈의 실현이 나의 뜻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 삶의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할 것.(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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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있어야 안심이 된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그러면 의심과 불안이 생긴다. 연인들은 사랑이 아니라 의심과 불안 때문에 같이 있으려고 한다. 아니, 의심과 불안이 사랑의 내용 가운데 일부이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없던 의심과 불안이 사랑을 하면 생긴다. '우정은 증멸할 의무가 없다'고 말할 때 보르헤스는 증명할 의무를 서로에게 지우는 사랑을 염두해 두고 있었을 것이다.(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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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은 믿음의 최상급이 아니라 믿음의 반대말이다.(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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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비참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보기 때문이다. '보여줄' 것을 그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익숙한 땅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185~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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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실보다 확신을 선호한다.(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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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실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면 죽는다.' 사실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화나게 한다. 그래서 사실을 부정한다. 사실을 공격한다. 사실을 직시하면 자신들의 신념을 반성하고 교정하게 할 가능성이 높은데(왜냐하면 그들의 확신은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확신에 따라 살아온 이제까지의 그들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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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는 불편함이 '회피'의 이유라고 지적한다. "당신이 진리를 회피하려 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 심오해서가 아니라 너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흔들리는 터전』) 익숙한 방에서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편한 일이다. 익숙한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그 방의 공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그 방안의 공기가 편한 것은 자신이나 자신과 다름없는 사람들의 호흡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방은 하나의 세계다. 그러나 극복되어야 할 세계이다.(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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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확신이 만들어 제공한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실'을 찾을 이유가 없고, 그러니 의심할 리 없다. 확신하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다.(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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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악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비범함에 이끌린다. 악을 행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악의 어떤 속성인 비범함을 소유하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내세우기를, 그렇게 보이기를 원한다.(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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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은 대부분 뜻밖의 사건이다. 뜻 안에 있을 때 보상은, 아무리 큰 보상이라도 마땅하거나 미흡하다. 뜻 밖에 있을 때 보상은, 아무리 작은 보상이라도 과분하거나 놀랍다.(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