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편혜영, 《홀》, 문학과지성사, 2016.

시월의숲 2025. 6. 18. 22:00

*

어떻게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28쪽)

 

 

*

죄와 잘 어울린다는 것만큼 사십대를 제대로 정의 내리는 것은 없었다. 사십대야말로 죄를 지을 조건을 갖추는 시기였다. 그 조건이란 두 가지였다. 너무 많이 가졌거나 가진 게 아예 없거나. 즉 사십대는 권력이나 박탈감, 분노 때문에 쉽게 죄를 지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오만해서 손쉽게 악행을 저지른다. 분노나 박탈감은 곧잘 자존감을 건드리고 비굴함을 느끼게 하고 참을성을 빼앗고 자신의 행동을 쉽게 정의감으로 포장하게 만든다. 힘을 악용하는 경우라면 속물일 테고 분노 때문이라면 잉여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십대는 이전까지의 삶의 결과를 보여주는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78쪽)

 

 

*

아내는 그럴 때가 있었다. 꼬투리를 잡아 뭐든 최악의 일을 상상하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을 과장했다. 그럴 때의 아내는 몹시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었다. 자신의 생각만 믿었고 그것을 진실로 확신했다. 오기의 말을 모두 부인했고 오기가 거짓말을 한다고 다그쳤고 자백할 때까지 몰아붙일 기세였다. 그렇게 한바탕 화를 내고 나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했다. 생각을 과장하는 버릇을 탓했고 되도록 좋은 생각만 하겠다고 약속했다.(82쪽)

 

 

*

훨씬 이전부터, 어쩌면 인생이라는 걸 어렴풋이 안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삶을 살아온 동시에 잃어온 것인지도 몰랐다.(176쪽)

 

 

*

허튼 약속 없이, 섣부른 이해 없이 아내를 슬픔에서 천천히 건너오게 하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오기는 미래의 슬픔을 이미 겪은 듯한 아내를 가만히 안아주었고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다가 그쳐가는 걸 지켜봤다.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208~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