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사월의책, 2013.

시월의숲 2019. 9. 11. 00:30

우리들 존재를 놓고 볼 때 의미 있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우리 행동들 사이의 유의미한 차이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왜냐하면 바로 이런 차이들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인지 또는 무엇이 될지를 결정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삶의 특정 단계에서는 특히나 이런 질문들을 피할 수 없다. 예컨데 전공을 결정해야 할 시점이 된 대학생이라고 해보자. 그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의사가 될까 변호사가 될까? 아니면 투자전문가가 될까 철학자가 될까? 정치적 입장을 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유주의를 따를까 보수주의 편에 설까? 어느 집회 장소에 가야 할까? 또는 친구들과의 의리를 지킬까, 여자친구를 바래다주러 갈까? 이 모든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의 기본적인 질문으로 이끈다. 즉, 어떤 근거로 나는 이 선택을 하는가?(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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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더 깊고 어려운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 올바른 행동 과정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추구하지 못한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무엇을 좋은 삶을 위한 첫 번째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판단력도 없다는 것이 문제다. 다시 말해서, 다른 행동이 아닌 바로 이 행동을 선택해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 문제라는 얘기다.(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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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문제 상황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가장 훌륭한 삶은 그것과 조율을 이루는 삶이라는 생각이 핵심을 이룬다. 이런 시각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호메로스가 그려낸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성스러움에 대한 감각을 부여해준다. 진정으로 의미있는 실존의 기쁨과 슬픔을 보증해주는 성스러움 말이다. 이 호메로스의 신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야말로 신이 죽은 이 시대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일신주의의 몰락에서 우리를 살아남게 하는 방법이며, 허무주의적인 실존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법이다.(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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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적인 의미에서 탁월성은 겸손이나 사랑 같은 기독교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음은 물론이요, 인간 의무의 준수라는 로마의 스토아적 이상 역시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 호메로스 세계에서의 탁월성이란 결정적으로 감사와 경외의 느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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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삶의 탁월성을 실존의 핵심 사실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느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데 실존의 핵심이 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이런 감각이야말로 감사의 느낌을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 요소이다. 어떤 삶을 감탄스런 것으로 보는 호메로스적 이해의 중심에는 이런 감사의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감사가 아테네를 향한 것이든 제우스나 비슈누를 향한 것이든, 아니면 아무 신도 향하지 않는 것이든 간에 그 점은 중요하지 않다.(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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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이 하는 일이란 우리에게 세계를 열어주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작품의 작동은 성스러운 무엇이라 할 수 있다. 그 작동을 통해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길을 인도받는다.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예술작품들을 신처럼 존경하고, 신에게 바치는 전당으로 삼는다.(18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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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들은, 그것들이 자유롭게 만들어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또한 자유롭게 취소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의미는 제작자를 넘어서는 권위를 갖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능동적 허무주의요, 단테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간 실존의 의미 있는 개념으로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252~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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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에 머무르며 사는 능력, 즉 일상 속에 감춰진 목적을 찾는 대신 그것이 선사하는 의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 이미 주어져 있는 행복과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은 기독교 이전 시대에서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 이전 시대뿐 아니라 불교 이전, 플라톤 이전, 힌두교 이전, 유교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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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우주의 모든 소리를 단번에 들으려 한다면, 우리는 곧 귀머거리가 될 것이다. 모든 다양한 의미들은 서로를 소멸시킬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인 우주가 감추고 있는 단일한 진리를 듣기는커녕 정신없이 지적거리는 화이트 노이즈만을 듣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색깔을 단번에 보려고 할 때 벌어지는 일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우리는 뭔가 단일한 의미가 있다고 여긴 나머지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만, 곧 그것을 찾는 일에 미쳐버리게 될 것이다. 보편성이란 귀머거리와 다름없는 것이요, 혼돈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혼돈이 그 자체로 우주의 궁극적 본성이라 해도, 우리는 단지 그때그때의 관점에서만 그것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