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5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연인』을 다시 읽었다. 책표지는 장자크 아노의 필름 한 장면이었다. 속표지에서 번역자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취리히에 있는 R에게 편지를 썼고, 베를린의 책장을 뒤지다가 우연히 당신이 번역한 『연인』을 찾아내서 읽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나는 오래전 대학 시절에 읽었으므로 당연히 이 책을 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다시 읽으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첫 페이지를 펼쳐든 순간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었노라고. 내가 삼십 년 전 모국어로 읽었던 당시에는 이 책이 내용이 아니라 언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과거에 내가 읽은 것은 다른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썼다.(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중에서) *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작별들 순..

흔해빠진독서 2024.03.18

삶이 거대한 농담이라면

얼마 전 밀란 쿤데라의 타계 소식에 다시 그의 책을 펼쳐 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읽은 그의 책이라고는 저 유명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다였으니.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을 과연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뭐 어쨌건. 변명을 하자면, 나는 너무 일찍 그의 책을 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이른 나이에(그의 책을 도무지 소화하기 어려운 나이에) 나는 그의 책을 읽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글쎄... 다시 『농담』으로 돌아와서, 이번에 읽은 그의 소설은 처음 그의 책을 읽었을 때보다는 잘 읽혔다. 그만큼 내가 컸다는 뜻(여러 가지 의미로)일 수도 있고, 책이 재밌었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의 각 장은 이 책의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고, 내용..

흔해빠진독서 2023.08.27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렇게도 길다. (44쪽,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중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젊은 날의 시집 를 읽었기 때문일까. 갑자기 시가 읽고 싶은 마음에 인터넷 서점에서 시집을 구입했다. 읽었던 시집을 다시 읽는 것도 좋겠지만, 어쩐지 소설보다 시를 등한시한 것 같은 마음에 시집을 더 구입하고 싶었다. 읽고 싶은 시집은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최승자의 시집을 더 구입하고 싶어서 이미 가지고 있는 을 제외한 이후 세 권의 시집을 구입했다. 비교적 최근(이라고 해도 무려 2010년에 나왔다니!)에 나온 은 분명히 내가 읽고 책장에 꽂아 놓았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최승자의 시집과 칼릴 지브란의 ,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집 세 권, 류인서의 까지. 최근에 본 영화 의 OS..

흔해빠진독서 2021.10.17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저기요, 아저씨. 센트럴 파크 남쪽에 오리가 있는 연못 아시죠? 왜 조그만 연못 있잖아요. 그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아시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 사람이 알고 있을 가능성은 백만 분의 일의 확률이었다. 기사는 고개를 돌리더니 날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날 놀리는 건가?"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좀 그런 일에 흥미가 있어서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입을 다물었다.(85쪽,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001.) * 몇 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아무런 말도 쓸 수 없었다. 재밌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무런 말도 쓸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보통 나는 ..

흔해빠진독서 2021.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