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90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1.

책은 민주주의와 같다. 그것은 하나의 이견이다. 뭔가를 제안하든 반박하든 책은 차이를 표방한다. 따라서 책을 쓰는 일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민주주의를 실천한다.(4쪽)  *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변치 않는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비판일 것이다. 비판이란, 그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일 때조차, 민주주의자의 의무에 가까운 특권이다. 민주주의가 더 이상 사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을 때, 민주주의자는 민주주의와 대결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구해야 한다. 진리에 기댐으로써가 아니라 진리를 의심함으로써 우리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표하지 않던가.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5쪽)  *  민주주의에는 확실히 다른 정체들에서는 볼 수 없는 원리상의 난점들이 있다. 가령 민주주의에서 데모스는 통치자이..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제작팀·유규오 지음,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6.

여러분은 정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치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한 설명에 따르면, "정치란 사회적 가치, 즉 희소한 자원의 권위적 배분"입니다. 이 말은 정치권력을 누가 갖고 있으며 어떻게 행사하는지에 따라 배분도 달라진다는 얘기입니다.(19쪽)  *  시민들 스스로가 자원 배분에 대한 통제력을 갖겠다는 이상,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19쪽)  *  선거가 아닌 추첨, 이것이 바로 아테네식 민주주의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테네 시민들은 왜 추첨을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장치로 활용했을까요? 아테네 시민들은 통치자가 일반 시민들과 분리되어 계속 통치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는 통치하는 것과 통치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2009.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이 두 가지 특성이 몸에 밴 채료는 성공한 턱이 없다, 아니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7쪽)  *  샤흐트는 매우 하얀 얼굴과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졌다. 그들은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 같다.(14쪽)  *  나는 하소연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하소연을 듣고 나면 상대방을 보다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며, 그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동정심을 갖게 된다.(15쪽)  *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것, 그것에도 향기와 힘이 있다.(23쪽)  *  어떤 종류의 솔직함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지루하게 만들 뿐이다.(24쪽)  *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우스꽝..

이승우, 《고요한 읽기》, 문학동네, 2024.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고,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생각은 어떤 문장의 작용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니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끌려나와 모습을 보이기까지 그 생각이 내 안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테니까요.(6쪽)  *  옛날 사람들은 똑바로 계속 걸으면 세상의 끝에 닿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고 믿었다. 세상이 평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바로 계속 걸으면 언젠가 출발한 자리로 돌아온다는 걸, 세상이 둥글다는 걸 알고 있는 우리는 안다. 둥근 지구에 사는 우리에게는 출발점이 곧 도착점이다. 끝은 시작에 있다. 등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다. 등뒤에 있는 사람을 만나..

황정은, 《연년세세》, 창비, 2020.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70쪽)  *  아무도 덮고 자지 않은 이불 냄새를 한영진은 좋아했다. 그 냄새는 뭐랄까, 단일했다. 알이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세상에 나타난 큰 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딱 십분 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새, 세상에 그런 게 있다면 그 새의 날기깃 냄새가 이럴 것 같았다. 한번이라도 사람이 덮고 잔 이불의 냄새는 이렇지 않았다.(71쪽)  *  잘 살기.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문학동네, 2016.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9쪽)  *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

배수아 - 모공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대사...하이너 뮐러의 희곡은 "읽어야" 한다

오직 감탄하게 되는 언어가 있다. 줄거리에의 몰입, 적당한 정서적 공감, 독서 배경이 뒷받침되는 지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오직 언어 자체에 매혹당하는 체험.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잘 알게 되기도 전에, 짧고 순간적일지라도 거의 육체적으로 느껴지는 전율의 체험. 내게 그런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작가 중 하나는 하이너 뮐러이다. 하이너 뮐러는 희곡작가로 알려졌지만 그가 남긴 산문과 시도 희곡 못지않게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뮐러의 희곡이 정치적인 의미나 미학적인 수준에서 비평가들의 관심을 너무도 많이 차지해버리는 바람에 도리어 그의 시나 산문들이 합당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보는 평가도 있다. 그의 산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산문의 개념과는 좀 동떨어진 것이 많다. 길이가 극도로 짧으면서 막간극을 연상시키는..

배수아 - '내 이익을 해치는 자는 죽여도 좋다'는 나치즘을 고발했다 금서가 된 '이 책'

나는 서른네 살의 김나지움(독일의 중등 교육기관) 교사이다. 열네 살 난 소년 스물일곱 명에게 역사와 지리를 가르친다. 나는 부유하지 않고 나이 든 부모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편이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심한 불안의 시대에 종신연금이 보장되는 공립학교 교사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 학생이 쓴 작문이 발단이었다. 감독관청에서 내려온 주제인 '독일은 왜 식민지를 가져야 하나?'로 쓴 작문이다. 학생 N은 이렇게 썼다. “검둥이는 모두 교활하고 비열한 데다 게으르기만 하다.” 나는 이것을 읽는 순간 당장 붉은 잉크로 삭제하고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지 지적을 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는다. N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