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7

빛과 실(한강 - Nobel Prize lecture)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뿐일까? 책자의 뒤쪽 표지에는 1979라는 연도와 내 이름이, 내지에는 모두 여덟 편의 시들이 표지 제목과 같은 연필 필적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페이지의 하단마다에는 각기 ..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등), 은행나무, 2024.

내가 쐐기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쐐기풀 차가, 산책길에 한 아름씩 꺾어오는 불가리스 쑥이, 여름 내내 어디에나 지천인 황금빛 골드루테 다발이 이 오두막의 삶에서는 아주 두드러지는 사건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루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15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  우리는 어떤 돌연한 사건과 마주치고, 그것을 스쳐 지나가고, 그런 후 그에 대한 생각에 잠긴 채 살아가게 되겠죠.(23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  *  내가 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면, 그 말은 내 편지가 나를 영영 떠난다는 의미였다. 내게서 나온 말은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혹은 나는 기억을 상실한 말과 다름없게 되리라. 그리하여 수십 년이 흐른 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별의 시간》, 암실문고, 2023.

나는 살기 위해 타인들을 필요로 하므로, 나는 바보이므로, 나는 완전히 비뚤어진 자이므로, 어쨌든, 당신이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그 완전한 공허에 빠져들기 위해 명상 말고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명상은 결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상은 그 자체만으로 목적이 될 수 있다. 나는 말없이, 공허에 대해 명상한다. 내 삶에 딴죽을 거는 건 글쓰기다.(8쪽)  *  나는 세상을 짊어지고 있으며 그 일에는 어떠한 행복도 없다. 행복? 나는 그보다 멍청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18쪽)  *  그렇다, 나의 힘은 고독에 있다. 나는 폭우나 거센 돌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밤의 어둠이니까.(29쪽)  *  우리는 오직 현재 속에서만 산다. 그건 언제나 영원히 오늘이기 때문이고, 내일은 오..

배수아, 《속삭임 우묵한 정원》, 은행나무, 2024.

나는 집중해서 독서를 할 생각이 없었고 책을 처음부터 읽어보려는 의도도 없었으며, 심지어 그 책이 무슨 책인지조차 몰랐고 제목이나 저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나는 저절로 나타나는 어떤 글의 파편과 우연히 마주치기를 바랐을 뿐이다. 늘 그랬듯이, 그것을 원했다. 아무런 의도도 계획도 없이 조우한 페이지를, 전체로부터 독립된 소리 혹은 운명으로서, 짧은 순간 동안 지극히 무심히 읽고, 상처도 사랑도 없이, 그대로 지나쳐가기를 원했다는 의미이다. 마치 나이프로 성서를 가르듯이.(7~8쪽)  *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10쪽)  *  나는 심지어 교류의 종말을, 특히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교류의 종말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내가 고독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

버넌 리, 《사악한 목소리》, 휴머니스트, 2022.

어쩔 수 없이 응대해야 하는 사람들을 그저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대했는데, 알고 보니 상대가 다른 인간과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면, 설마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요.(42쪽, 「유령 연인」 중에서 )  *  이 수수께끼처럼 신비롭고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기이한 존재는 현재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과거의 괴팍한 열정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거지요. 눈동자에 서리는 멍한 표정, 맥락도 없이 떠오르는 아련한 미소가 이해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흡사 괴상한 집시 음악에 붙여진 가사 같았어요. 동시대의 여인들과 딴판으로 다르고, 아득하게 거리가 먼 이 여자는 자신을 과거의 어떤 여인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뭐랄까, 간질간질한 연애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 모든 걸 설명했어요.(43쪽,..

김선오, 《미지를 위한 루바토》, 아침달, 2022.

시가 어떤 진실에 닿을 수 있다는 말. 그것도 잘 모르겠다. 모든 시가 진실을 향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조금 사기일 것이다. 그러나 시 쓰기의 즐거움만큼은 진실이므로 시가 조금이라도 진실에 가닿으려면 역시 즐겁게 쓰는 수밖에 없다. 시 쓰기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한 나의 삶 역시 그렇다면 약간은 진실이라고 할수도 있겠다.(11쪽)  *  내게 명상이란 '살아 있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살아 있음의 좋음'을 실감하는 일이다. 마치 들리지 않는 음악과 적히지 않은 시가 들리는 음악과 적힌 시의 좋음을 강화하듯이. 몸의 존재가 없다면 몸 이전과 이후로 발생하는 좋음 역시도 없을 것이기에.(26쪽)  *  평소 낮은 텐션과 목소리로 인해 영혼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타인의..

유디트 헤르만, 《레티파크》, 마라카스, 2023.

평범한 동시에 낯선 삶의 광경은, 내가 기억하기로, 『레티파크』 속 이야기들에 영향을 주었다. 의식한 것은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다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의미가 실린 타인들의 일상이 말이다. 당신이 글을 쓰고 있는 장소가 글에 자취를 남기고, 그 자취는 나중에야,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눈에 띈다, 늘 그렇다.(7~8쪽, '레티파크에 대하여' 중에서)  *  때로 어떤 예감들이 우리를 엄습한다. 우리 등 뒤에 누가 서 있는 듯한 느낌. 하지만 몸을 돌리면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꾼 어떤 꿈들은 하루 종일 당신을 따라다닌다. 낮의 빛은 그 꿈들을 쫓아낼 수 없다.(9쪽, '레티파크에 대하여' 중에서 )  *  빈센트의 어머니는 사람이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