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양자경 주연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개봉할 때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다. 내가 사는 곳의 영화관에서는 개봉을 하지 않았거나 해도 아주 극소수의 개봉관에서만 했을 것이다(대부분 내가 보고 싶어 한 영화들은 그랬다). 물론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거나 발품을 팔았다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게으르고 게을러서, 보고 싶은데 개봉하는 곳이 별로 없구나 하면서 무심히 넘겼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엔 극장 개봉을 놓치더라도 볼 수 있는 루트가 아주 많으므로,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시기의 문제에 나는 늘 관대하다.  그리하여 이번에 넷플릭스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이 영화는 2022년에 개봉했다. 지금으로 치면 3년이나 전에 개봉했음..

봄날은간다 2025.03.16

사악한 목소리

베일처럼 덧씌워진 타자의 정체성, 끝없이 현재를 침습하는 과거, 기억의 유령. 반듯한 정상이라 이름한 양태는 너울처럼 덮쳐오는 불안한 이질성에 일그러지고 휘어져 섬뜩하게 낯선 이면을 드러낸다. 인식의 낙차에서 탄생하는 새롭고 섬뜩하고 무서운 것들은 위험하고 또 매혹적이다. - 버넌 리, 『사악한 목소리』 중 옮긴이 김선형의 해설 중에서  *생소한 작가의 작품을 읽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이번에 읽은 버넌 리라는 작가의 작품도 그랬다. 제목 또한 '사악한 목소리'가 아닌가. 유혈이 낭자한 호러 소설은 아니지만, 여름에 어울리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 길고도 긴 여름의 뜨거운 습도를 견디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소설이었으므로. 세 편의 소설 모두 공통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에서는 과거에 집안..

흔해빠진독서 2024.09.08

쓸 수 없음에 대해 쓰기

매혹이란 무엇일까. 알다시피 그것은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존재의 자율을 상실하고, 마음의 근육이 녹아내리고, 액체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 보이지 않는 물길 따라 한없이 흘러가버리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이전으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김선오, 『미지를 위한 루바토』 중에서)  *내가 김선오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카우프만'이라고 하는 잡지(?) 혹은 쇼핑몰(?)(사이트의 정체성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에 실린 그의 인터뷰에서였다. '나는 사치스럽게 잔다'라는 제목의 인터뷰였는데, 그전까지도 나는 김선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랬으므로 당연히 그가 시인인지도 알지 못했으며,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짧다면 짧은 인터뷰에서 그의 생각과 언어가 너무도..

흔해빠진독서 2024.08.10

역사가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 누군가 이 책을 원서로 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누군가의 서평을 읽었을 때도 그저 무덤덤했다. 그저 재미 교포 2세가 쓴 일본 교포들에 대한 이야기로구나 하면서 무심히 넘겼던 것이다. 그러다 애플 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에 대한 영상이 유튜브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흥미가 생겼다. 예고편을 보았고, 드라마에 나온 배우들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그들의 인터뷰와 드라마의 원작 소설가인 이민진의 여러 인터뷰까지 보게 되었다. 예고편으로 본 드라마의 영상미에 매료되었고, 무엇보다 이민진이라는 작가의 인터뷰가 -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내가 무려 '가족'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저..

흔해빠진독서 2024.03.02

이토록 평범함 미래라니

똑같은 투덜거림을 하기는 정말 싫었다. 하지만 나는 또 매번 하던 투덜거림으로 시작을 해야 할 것 같다. 글을 쓰기도 전에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과, '할 것 같다'라는 모호한 말을 쓰는 것조차 너무나도 싫지만. 싫어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글쓰기라는 것도 있는 거겠지 세상엔. 어쨌거나 김연수의 비교적 최근작인 『이토록 평범함 미래』를 읽었다. 사실 읽은 지는 꽤 되었다. 늘 그랬듯 지금의 나는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느낌만이 미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느낌이란, 그의 소설이 으레 그러하듯 절망적이지만 결코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긍정적이고 따뜻한 종류의 것이었다. 오랜만에 나온 이번 소설집은 이전보다 화려하고 재기 발랄하지는 않지만 한층 깊어진 느낌이었다. 좀 나..

흔해빠진독서 2023.10.18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황정은의 『백百의 그림자』를 읽었다. 나는 이 소설을 무재와 은교의 사랑 이야기로만 읽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읽는다는 건 은교와 무재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소설은 그들의 사랑을 절제된 문장으로 꾹꾹 눌러 담고 있지만, 그들을 둘러싼 암울하고 허망한 상황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그 속에서 그들의 행보가 좀 더 빛 쪽으로 한걸음 다가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에 자신이 먹히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지는 않도록. 사람들이 슬럼가라고 부르는 곳에서, 곧 철거가 될 건물에서 근근이 삶을 이어온 사람들에게 그곳은 일터 이상의 장소일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라나 그곳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부모가 진 빚..

흔해빠진독서 2022.08.21

당신들 모두 같은 생각인가요?(영화, 『비상선언』)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와 인질의 관계 혹은 테러의 이유 같은 것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테러 이후 남겨진 사람들(테러를 당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혹은 테러를 당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갈등과 서로 간의 이기심(이타심을 빙자한)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의 응징과 승객들을 구출하는 영웅 서사가 중심이 되는 액션 영화가 아니라 테러를 통해 촉발되는 인간들의 이기심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빈약하거나 때로는 너무 넘친다. 인간의 이기심과 희생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너무 단선적으로 그리고 있어서 빈약하고, 그것을 둘러싼 드라마가 너무 감정적―소위 신파적―이라서 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

봄날은간다 2022.08.09

부엉이에게 울음을

"나는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였다. 내가 오직 다락방에서 생애 초반기의 대부분을 홀로 보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안에 아무렇게나 쌓여있으면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책들을 홀로 들춰보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다."(116쪽) 그렇게,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는 스물아홉 살에 두 번째 이혼을 결정하고 그즈음 막연하게 작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는 잊고 있던 과거의 다락방 시절을 떠올린다. 자신이 '책들의 바다에서 홀로 표류하던 시절' 그러니까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던 시절'의 기억을. 그 시절을 그녀는 '홀로'의 세계라고 명명한다. 그곳은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공간..

흔해빠진독서 2022.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