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 10

단상들

*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 에밀 아자르, 《가면의 생》 중에서   익명의 세계에서 익명으로 한 사람으로서 알려지고 싶은 욕망이란 것이 말이 되는 말인가? 가끔 익명의 세계와 익명이 아닌 세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간격에 대해서.(20241215)  * 요즘엔 뭘 먹던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말이 아니라, 조금일지라도 내가 먹는 음식의 성분이(딱히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과하다는 느낌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내 여자의 열매〉의 주인공의 시작이 이랬을까?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입속의검은잎 2024.12.31

하얼빈

'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의 저 대사로 끝난다. 하지만 끝이 아니라 시작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지금 대한민국 역시 혼란한 시국이어서 그럴 것이다. 나는 감독이 저 대사를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영화는 특히나 아쉬움과 열광의 가운데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는 《명량》이나 또 다른 안중근 영화인 《영웅》, 《남한산성》을 언급하면서 이 영화의 포지션을 가늠하기도 한다.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난 후 그 영화들이 떠올랐다. 분출되는 감정의 양으로 보자면 제일 위에  《명량》이, 중간에 《남한산성》 이, 제일 아래에 《하얼빈》이 놓여 있지 않을까. 그만큼 이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크게 동요시키지 ..

봄날은간다 2024.12.25

늘 그렇듯 문제는

이렇게 차분히 앉아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쓸 생각조차 없이 - 하지만 무언가라도 쓸 요량으로 - 하얀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다. 한때의 호기심으로 트위터에 짤막한 생각을 올리면서부터 블로그와는 좀 멀어진 듯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물론 트위터에서의 단상을 블로그에 옮기기도 하고, 거기서 비롯된 생각을 좀 더 길게 적어보기도 했지만 어쩐지 트위터를 하기 전에, 내가 블로그를 대하던 그 마음으로부터는 좀 멀어진 듯 느껴졌다. 아무렴 어떠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마음 같은 것이 있었다(그런 이건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트위터를 하기 전에도 블로그에 글을 그리 자주 올리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내 마음속에 내 삶을 조금이라도 길게 적어보고 싶은 욕망이 있기 ..

어느푸른저녁 2024.12.23

단상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는 트윗을 보았다. 아마 고등학생인 것 같은데, 그의 의문이 순수하면 할수록(설사 어떤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이 사회는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좋은' 대학이란 무엇이며,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딱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못이 언다고 오리들이 얼거나 굶어 죽는 것은 아니듯, 좋은 대학을 못 간다고 그 사람들의 인생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 자신의 인생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갈 뿐이니까. 세상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내가 보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것이 더 많으니까. 내가 아는 확실한 한 가지는, 세상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2..

입속의검은잎 2024.12.15

네가 정치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제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약속 시간은 마침 탄핵안 표결을 하는 시간이었고, 나는 표결을 다 보고 나서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나는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탄핵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농담조로 말했다. "네가 정치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나처럼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도 저절로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세상이라니." 그러고는 불법적인 계엄령에 대해서, 포고문에 실린 그 무시무시한 말에 대해서, 탄핵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평소 정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거리에 나가 목청껏 소리치며 부당함을 외친 저 보통의 시민..

어느푸른저녁 2024.12.15

명동성당에서

나는 처음으로, 서울역에서부터 명동성당까지 걸어서 막 도착한 참이었다. 하지만 성당을 보기 전에 먼저 본 것은 구걸을 하고 있는 부랑자였다. 나는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린 그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몇 년 전 스페인의 세비아 대성당에서 본 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려한 대성당과 정반대로 아주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의 걸인. 그것은 내게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때의 그 느낌을 명동성당 앞에서도 느낀 것이다. 물론 명동성당은 화려하다기보다는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활기찬 도시의 모습과는 무척 대조적인 그 풍경이 어쩌면 서울이라는 도시를 온전히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풍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성당은 내 생각과는 달리, 주위에 높은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성당..

어느푸른저녁 2024.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