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아글라야 페터라니라는 이름도 생소한 작가가 쓴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라는, 제목까지 생소한 책을 읽었다. 읽은 지 꽤 되었지만 쓸 말을 찾지 못하다가 이 책의 맨 처음 실려 있는 '이 책에 대하여'라는 글의 첫 문장을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것이 이 소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임을. 이 문장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음을. 이 글은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유럽을 떠돌며 루마니아어에 이어 스페인어를 익혔지만 읽거나 쓰지 못하다가 스위스에 정착해 독일어를 스스로 읽고 쓰게 된 이가 쓴 첫 소설이다. 여러 언어를 알았지만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했던 이가 자신이 택한 언어로 처음 쓴 자전적 글은 우리가 한 언어를 가지고 있고 알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자신의..

흔해빠진독서 2026.01.11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무언가를 붙잡아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난 뒤, 혹은 어딘가로 짧은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 남겨진(남겨졌다고 착각하는) 느낌들을 적고 싶다고. 물론 책을 읽는 순간, 영화를 보는 순간, 여행을 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만으로도 좋지만(그 순간에 충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 순간을 지난 후에도 내게 남겨진 것을 그냥 사라지게 놔두는 것이 아쉬운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읽지 않을 이런 글들을, 오롯이 나만을 위해 묵묵히 적는다. 이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만을 위한 위안이다. 비참하면 비참한대로,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어느 순간 나를 지배했던 감정들의 정체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부족하나마(..

흔해빠진독서 2025.10.27

당연하고도 힘차게, 쓸쓸한 자는

이 책은 제발트가 인상 깊게(본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읽거나 본 여섯 명의 작가들(소설가이거나 화가)에 대한 글이다. 요한 페터 헤벨, 장-자크 루소, 에두아르트 프리드리히 뫼리케, 고트프리트 켈러, 로베르트 발저, 얀 페터 트리프가 그들이다. 내가 한 번이라도 이름을 들어보거나 읽었던 책의 저자라고 한다면 고작 장-자크 루소와 로베르트 발저뿐이다. 그래서일까? 다른 작가들보다도 그 둘에 관해서 쓴 글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로베르트 발저는 나 역시 흠모해 마지않는 작가여서 제발트가 그에 대한 애정을 품어왔다고 고백하는 대목에서는 마치 운명의 이상형을 만난 것 같은 친밀함을 느꼈다. 이로 인해 나는 제발트뿐만 아니라 발저 역시 더욱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되었다. 배수아는 '제발디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

흔해빠진독서 2024.04.07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서 단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할지라도, 그래서 거의 그것을 잊은 채로 지내더라도, 언젠가는 책이 먼저 말을 걸어줄 것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때까지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거의 그것을 잊은 채로. * 나는 저 문장을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을 읽은 지 7년 만에 썼다. 처음 읽고 나서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했지만, 무슨 조화인지 무려 7년 만에 나는 그 소설이 다시 생각이 났고,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쓰게 된 것이다. 그 책처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배수아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를 올해 초에 읽고 지금까지 어떤 말도 쓰지 못했다. 『자화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을 내 책상 위 보이는 곳에 늘 놓아두었다는 것이다. 그..

흔해빠진독서 2022.08.30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에게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 이곳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에게.(피에르 베르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중에서) * 저는 오래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당신께 전하는 안부입니다. 이런 것도 안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늘 그렇듯, 이 편지는 부치지 않을 것입니다. 부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나는 늘 당신을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부디 평온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나, 나는 곧 당신입니다." '부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편지'에 대해서 늘 생각합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아니라 부치지 '않는' 편지 말입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그것을 상대방에게 꼭 전달해야 한다는 간절함..

흔해빠진독서 2022.03.19

파워 오브 도그

(스포일러 주의) *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를 보았다. 이 영화는 뭐랄까, 여러모로 내 예상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외피는 서부극처럼 보이는데, 처럼 퀴어 로맨스 영화인가 싶다가도, 그보다는 인물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인가 싶을 때쯤 차가운 복수극으로 끝난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제목의 의미가 무엇일까 계속 생각했다. '개'로 대변되는 세력은 도대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그 의문은 영화의 마지막에 피터가 읽는 성경의 한 구절을 통해서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 '비로소' 나는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존재감과 그가 맡은 '필'이라는 인물의 위악적인 내면 때문에 그에게 자꾸만..

봄날은간다 2022.01.15

이터널스

이 모든 논란들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가? 영화를 보고 나와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노이즈 마케팅인가? 어째서 이 영화에 대한 혹평이 이리도 많은지, 혹평에 대한 기사만 한가득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영화는 '마블' 영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블에서 나오는 모든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다 고만고만한 액션과 유머와 흥겨움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건 자기 복제와 무엇이 다른가? 모든 것을 다 비슷하게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애초에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터널스를 보러가면서 어벤져스를 기대한 것일까? 이것은 클로이 자오 감독이 만든 라는 영화인 것이다. 물론 그들의 기대감과 실망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는 있다. ..

봄날은간다 2021.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