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40

단상들

*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 에밀 아자르, 《가면의 생》 중에서   익명의 세계에서 익명으로 한 사람으로서 알려지고 싶은 욕망이란 것이 말이 되는 말인가? 가끔 익명의 세계와 익명이 아닌 세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간격에 대해서.(20241215)  * 요즘엔 뭘 먹던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말이 아니라, 조금일지라도 내가 먹는 음식의 성분이(딱히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과하다는 느낌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내 여자의 열매〉의 주인공의 시작이 이랬을까?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입속의검은잎 2024.12.31

단상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는 트윗을 보았다. 아마 고등학생인 것 같은데, 그의 의문이 순수하면 할수록(설사 어떤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이 사회는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좋은' 대학이란 무엇이며,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딱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못이 언다고 오리들이 얼거나 굶어 죽는 것은 아니듯, 좋은 대학을 못 간다고 그 사람들의 인생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 자신의 인생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갈 뿐이니까. 세상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내가 보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것이 더 많으니까. 내가 아는 확실한 한 가지는, 세상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2..

입속의검은잎 2024.12.15

단상들

*이 세상에 엄연히 생을 부여받아 존재했던 어떤 종이 남김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인간의 과도한 사냥에 의해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멸종, 절멸을? 정말이지 끔찍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이 안 되는.(20241118)  * 지인이 불러서 식사 자리에 갔는데 모르는 사람이 함께 와 있을 때의 어색함이란. 그 모르는 사람이 실은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모드로 돌입해야 한다는 사실의 피곤함이란. 사실 내가 그의 말을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했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과 지루함이란.(20241119)  * 앗, 고기는 이제 그만! 어째 사람들과 만나기만 하면 고기를 먹게 되는 것인지. 내가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돼지고기를 하루에 ..

입속의검은잎 2024.11.30

단상들

*그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뿐인데, 그게 왜 이리 힘든 것일까?(20241102)  * 그저 풍경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평화로운 일인가.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로서 아니라, 그저 풍경으로 존재하는 사람들. 내게 필요한 건 어쩌면 그런 존재감, 거리감이 아닐는지.(20241102)  * 처음엔 노란 단풍인가 싶었다. 잎이 우수수 떨어진 나뭇가지에 노란 등처럼 달려 있는 그것이. 하지만 가까이 가보니 그것은 단풍이 아니라 아주 작은 모과였다. 마치 알전구를 켜놓은 듯, 파란 하늘과 샛노란 모과가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모과가 모과임을 숨길 수 없는 그 향기!(20241103)  * 11월에 노랑나비를 두 번이나 보았다. 노랗고 가녀린 그 나비의 이..

입속의검은잎 2024.11.15

단상들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을 따라 산책을 했다. 점심시간에 누리는 아주 짧은 사치.(20241016)  *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삶은 우리를 돌멩이처럼 허공으로 던져버렸는데, 날아가면서 우리가 말하는 것이다. "봐, 내가 내 힘으로 나가고 있잖아."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우리는 추락하는 중이며, 누구나 추락할 운명을 타고났다. 태어났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날아가는 중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20241017)  * 어둠이 내린, 어둠이 스며있는, 어둠에 물들어가는 그런 풍경들, 사진들에 눈길이 머문다. 어둠은 비밀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20241017)  * 포니정 시상식에서 한강의 수상 소감을 듣는다. 그는 자신..

입속의검은잎 2024.11.01

단상들

* 조금만 신경(스트레스)을 써도 몸이 먼저 반응을 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20240930)  * 문득 윤성희의 단편, 「그 남자의 책 198쪽」이 떠올랐다. '공원에서 잡동사니 물건을 파는 사람'이 나왔지 아마. 그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모든 것이 다 희미하지만, 어째서 이 사진을 보고 바로 그 소설을 떠올렸을까. 기억이란 참 알 수 없다.(20240930)  * 누군가 내게 "너도 사랑을 하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20241001)  * 말은 어떤 힘이 있을까. 나를 걱정하는 말들이 내게 어떤 소용이 있을까. 나는 늘 말이 가진 힘에 대해서 생각했다. 말은 우리를 구속하고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친다고..

입속의검은잎 2024.10.17

단상들

*모두가 나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 내가 가족들에게 감내한 시간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혹은 모른 척 한 채), 나를 생각한답시고 내뱉는 말들은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뿐이고. 이런 시답잖은 말들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이 공간밖에 터놓을 곳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슬플 뿐이고. 가족이란 무엇인가. 그 속에서 한 개인의 존재란… 이래저래 심란한 추석을 보내고 있다.(20240916)  * 오늘 종일 나의 이상스런 기분과 괴로움의 이유를 지금에야 알았다. 마당에 나가 보고. 교교하다. 만월(滿月) 때 내게 오는 달병病, Mond krankheit. - 전혜린  오늘 종일 나의 이상스런 기분과 괴로움의 이유가 단지 달병病이었으면! 구름이 많은 하늘이었지만 그래도..

입속의검은잎 2024.09.29

단상들

*나는 잠으로 도피하고 싶은 걸까, 잠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걸까?(20240901)  * 잠이 너무나 쏟아져 쓰러지듯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저녁이 되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린다. 귀뚜라미일까? 구월은 잠과 풀벌레 소리로 시작된다.(20240901)  * 아파트에 귀뚜라미가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20240902)  * 저는 늘 적응하느라 애쓸 따름입니다. 늘 적응만 하다가 볼일을 다 보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기는 합니다만.(20240902)  *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당신의 마음이 편할 대로 하세요. 그는 몇 번이고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것, 편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거절이나 사양..

입속의검은잎 2024.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