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53

단상들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배수아, 『속삭임 우묵한 정원』 중에서) 나는 그것을 본다. 나를 보는 그것이 되어. 교차하는 시선 속에 나는 그것이 되고, 그것은 내가 된다. 우리는 언젠가 서로를 그렇게 본 적이 있고, 앞으로 그렇게 볼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던 내가, 다시 나를 바라보는 그것이 되는 때가. 말은 혼란스럽지만 느낌은 명징한 순간이.(20250701) * 퇴근을 하는데,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곳에서 참새 한 마리가 날고 있다가, 내가 쳐다보자 바닥에 내리더니 내 앞에서 통통거리며 왔다 갔다 한다. 순간 참새와 내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진다.(20250704) * 사무실 냉장고에 넣어둔 피자는 늘 집에 와서야 생각이 난다. 그것은 영원히 사무실..

입속의검은잎 2025.07.15

단상들

*어젯밤에는 심상찮은 기세로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하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본 것도 같은데. 이상하지, 눈부시게 환한 날씨가 어쩐지 아쉽다. 때로는 밝은 햇살보다 어두운 빗속에 갇히고 싶은 날이 있는 걸까. 비가, 혼자 있음의 정당한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20250614) * 가끔 생각해. 왜 나는 네가 아니고 나인지. 왜 나는 내 몸과 내 마음이어야 하는지. 왜 나는 너의 몸과 너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는지. 그러니까 왜 내가 나여야만 하는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무덤덤해진 저 문장이 왜 이렇게 사무치는지.(20250614) *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을 완독 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과 함께 다음 책으로 건너가는 순간이 주는 기쁨 또한 있다. 그..

입속의검은잎 2025.06.30

단상들

*오로지 쿠키를 먹기 위해 커피를 내렸다. 오로지 책을 읽기 위해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오로지 휴일을 위해 휴일을 보냈다. 오로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유월이 되었다.(20250601)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시 읽고 있다. 여름의 초입에 압도적인 눈의 이미지로 가득한 이 소설을 읽고 있으니, 나 역시 소설 속 경하처럼 현실인지 꿈인지,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시공간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눈과 새와 피의 이미지가 한데 얽혀 눈앞에 어른거린다.(20250601) *늦잠을 자고 일어나 슬슬 마실 가듯 투표장으로 향했다. 투표장은 내 집 바로 옆에 있는 학교였다. 점심 전이었는데 사람들이 꽤 있었다. 기억하고 있던 내 번호를 말하고,..

입속의검은잎 2025.06.13

단상들

*광장 왼편 경사로를 끝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질척이는 소음의 늪지를 지나 바람을 흔드는 새떼들의 하늘 지나 낯선 길 하염없이 가고 있는 젊은 그녀 본다 겨잣빛 표정 위에 스치듯 피었다 지는 햇살 꽃송이 본다 - 류인서, 「삽화-부산역」 중에서(『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수록) 류인서의 시집을 들췄는데, '부산역'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가 눈에 들어온다. 1박 2일간의 일정으로 부산을 다녀왔기 때문일까. 여행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내가 부산에서 한 거라곤 고작 어젯밤의 짧은 해운대 산책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이라는 단어가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는 느낌이다.(20250516) * 책을 읽고 있는데, 정말 책의 글자들이 낱알처럼 흩어지는 느낌이다. 그러모아지지 않고 흩어지고, 새어나가고, 부서져..

입속의검은잎 2025.06.01

단상들

*'월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은' 지나간다. 내 삶의 월요일 하나가. 애정과 증오의 월요일 하나가.(20250428) * 이제 곧 녹색이 파도처럼 쏟아질 것이다. 나는 늘 녹색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연두색이랄까, 옅은 녹색이 아니라 아주 진한 녹색, 검은색에 뿌리를 둔 녹색에 대해서. 어둠으로써의 녹색 혹은 녹색의 어둠, 그 침묵에 대해서. 하지만 나는 늘 그것에 대해서 생각할 뿐이다. 이제 곧 도래할 녹색으로 가득한 침묵의 세계에 대해서.(20250428) * 파도는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이고, 쏟아지는 것은 폭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쏟아진다는 말이 떠올랐는데, 왜 폭포가 아니라 파도가 생각났을까. 뭐, 아무렴 어떠냐마는.(20240429) * 도서관에서 무료 나눔 한 책을 왕창 가..

입속의검은잎 2025.05.16

단상들

*“오늘부터 일기를 꼭 쓸 것! 규칙적으로 쓸 것! 포기하지 말 것! 설령 아무 구원도 오지 않더라도, 나는 언제라도 구원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 프란츠 카프카, 중에서 나는 언제라도 구원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구원을 바라는가?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일기란, 내가 나 자신을 구원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일까. 그러니까 구원이란 내가 나에게 내미는 위로 같은 걸까.(20250416) *전혀 알지 못하는 영화감독이 만든, 한 번도 본 적 없는 영화의 장면들을 음악과 함께 편집한 영상을 본다.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한 채, 분절되고 파편화된 장면들만이 눈앞에 펼쳐지고, 즉흥극처럼 터져 나오는 배우들의 표정, 몸짓, 손짓, 눈빛들. 그 맥락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입속의검은잎 2025.04.28

단상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네 결심은 굳고, 나는 그 굳은 결심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하는 말은 그저 네 결심을 존중한다는 말뿐.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라는 말뿐. 이토록 무기력한, 이토록 안타까운. 무엇을 결정하든 너를 지지한다는 말이 결코 무관심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20250401) * 등산을 했는데 왜 다리가 아니고 어깨가 아픈 걸까?(20250401) * 이상한 세계에서, 이상한 사람들과, 이상한 일들을, 이상한 기분으로, 이상할 정도로 오래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아무도 없는 집은 천국과 다름없다. 이상하지. 이상한 건 세상인가 나인가?(20211201) 그렇게 이상한 세계에서 나는 또 적응 중이다. 내내 적응만 하다..

입속의검은잎 2025.04.15

단상들

*길을 걷다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까치의 배를 보았다. 이제 춥다는 말은 유통기한이 지난 말처럼 느껴진다.(20250313)  * 오래전에 '우주의 원더키디'라는 만화가 있었는데, 제목 앞에 연도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분명 2025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2020년이었다. 그러니까 그 만화의 제목은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였던 것이다. 뭔가 크게 예상을 벗어난,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20250315)  * 직장 동료의 문상을 하러 가서 나는 무슨 말을 그리도 지껄였을까. 영정사진 앞에서, 향은 불이 잘 붙지 않아 당황스러웠고, 급격히 떨리는 손으로 겨우 불을 붙인 향이 향로에 잘 꽂히지 않아서 더욱 당황스러웠던. 나는 그곳에서 오래 준비한 죽음과 갑작스러운 ..

입속의검은잎 2025.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