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46

단상들

*길을 걷다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까치의 배를 보았다. 이제 춥다는 말은 유통기한이 지난 말처럼 느껴진다.(20250313)  * 오래전에 '우주의 원더키디'라는 만화가 있었는데, 제목 앞에 연도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분명 2025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2020년이었다. 그러니까 그 만화의 제목은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였던 것이다. 뭔가 크게 예상을 벗어난,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20250315)  * 직장 동료의 문상을 하러 가서 나는 무슨 말을 그리도 지껄였을까. 영정사진 앞에서, 향은 불이 잘 붙지 않아 당황스러웠고, 급격히 떨리는 손으로 겨우 불을 붙인 향이 향로에 잘 꽂히지 않아서 더욱 당황스러웠던. 나는 그곳에서 오래 준비한 죽음과 갑작스러운 ..

입속의검은잎 2025.04.01

단상들

*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잘 지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라고 내뱉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아쉽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운. 이런 게 말의 힘일까. 기대는 없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하는 일에 기대라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기대란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걸 말하는데, 나는 일과 관련해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20250228)  *탄핵을 둘러싸고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 내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 여러 인간 군상들의 발언과 행동을 보면 새삼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깊이(하지만 비관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의 존엄함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혐오스러움을 먼저 깨닫고 경악하게 되는 것..

입속의검은잎 2025.03.15

단상들

* 신형철은 진은영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의 해설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 진은영은 그런 것을 가졌다'라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 이라는 문장은 얼마나 아름다운지.(20250217)  * 당연한 말이겠지만, 몸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온갖 망상과 비극적이고 우울한 생각들이 온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듯. 그것이 전혀 치명적이지 않은, 흔하디 흔한 감기 같은 것일지라도. 하지만 아프지 않을 수는 없으니, 몸이 아플 때 정신이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20250218)  * 아침에 일어날 때 그날의 피로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어제 쌓였던, 하지만..

입속의검은잎 2025.02.28

단상들

* 안경을 바꿨는데, 전에 쓰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을 골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관심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말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왼쪽 안경알의 도수를 높여서 약간 어지럽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되겠지.(20250201)  * 그동안 겨울인데 왜 이렇게 포근하냐고 투덜댔는데, 요즘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칼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다. 추위도 몰아서 오는구나.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님 그냥 그런 건지.(20250206)  *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들과 떠올리려 애쓰는 것들 사이에서.(20250208)  * 점심으로 뭐 먹을 게 있나 싶어 냉장고를 열였더니 설날에 만든 부침개가 남아 있었다. 문득 아직도 응달진 곳에 남아 있는 ..

입속의검은잎 2025.02.15

단상들

* 배수아 작가가 작년부터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다시 본다, 고전2〉 시리즈를 읽고 있다. 한겨울에 곶감 빼먹듯, 아까워서 한 편씩,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고 있다.(20250117)  * 산책을 하는데 백로인지 왜가리인지 모를 새 한 마리가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내 머리 위로 날아가다가 소나무 위에 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보아도 새는 보이지 않는다. 새는 나를 보고 있을까? 보이지 않는 새가 내게 가던 길 가라고 말하는 것 같아 머쓱한 기분으로 다시 걸었다.(20250118)  * 베른하르트의 글에는 치명적인 질병이 자주 등장하여 주인공의 정신세계와 언어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아마도 그 자신이 어린 시절 전쟁을 목격했고 결핵과 늑막염을 앓으며 생명을 잃을 뻔했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입속의검은잎 2025.02.01

단상들

*조금 덜 외롭기를.(20250101)  * 2025년이라고 써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아직 좀 더 친해져야 할 듯.(20250101)  * 대다수 국민들의 속을 뒤집어 놓고 화를 돋우며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 저들의 전략이라면, 저열할지라도 아주 잘 먹히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애쓰지 말자. 정신 건강에 해롭다.(20250104)  * ‘은밀한 생’에서 커피를 마시며, ‘은밀한 생’을 찾는 은밀한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며, 사람들을 만나고, 애도하고, 분노하고 때로 기뻐하며 소소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이 보통의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요즘 들어 그런 의문이 더욱 커집니다. 이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20250104)..

입속의검은잎 2025.01.17

단상들

*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 에밀 아자르, 《가면의 생》 중에서   익명의 세계에서 익명으로 한 사람으로서 알려지고 싶은 욕망이란 것이 말이 되는 말인가? 가끔 익명의 세계와 익명이 아닌 세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간격에 대해서.(20241215)  * 요즘엔 뭘 먹던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말이 아니라, 조금일지라도 내가 먹는 음식의 성분이(딱히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과하다는 느낌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내 여자의 열매〉의 주인공의 시작이 이랬을까?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입속의검은잎 2024.12.31

단상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는 트윗을 보았다. 아마 고등학생인 것 같은데, 그의 의문이 순수하면 할수록(설사 어떤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이 사회는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좋은' 대학이란 무엇이며,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딱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못이 언다고 오리들이 얼거나 굶어 죽는 것은 아니듯, 좋은 대학을 못 간다고 그 사람들의 인생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 자신의 인생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갈 뿐이니까. 세상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내가 보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것이 더 많으니까. 내가 아는 확실한 한 가지는, 세상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2..

입속의검은잎 2024.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