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옮김 5

페터 한트케,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 아트북스, 2020.

지금 내게 떠오르는 예는 모두 풍경화들이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아름다운 침묵의 공간, 위협이 도사리는 반수면 상태와도 같은 풍경. 특이하게도 그런 그림들은 모두 연작으로 그려졌다.(19~20쪽) * 나는 누군가와 함께 동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궁리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혼자인 것이 행복했다. 나는 '그 길'을 걸었다. 그늘진 도랑에서 '그 시냇물'을 보았다. 나는 '그 돌다리'에 섰다. 거기 바위의 균열이 있었다. 소나무들이 있었고, 옆길에 줄지어 선 모습이었다. 길의 끝에는 까치 한 마리가 커다란 흑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나무 향기를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영원히". 나는 걸음을 멈추고 메모했다. "무엇이 가능한가 - 바로 이 순간에! 세잔의 길에는 침묵."(40~41쪽) * 타인의 ..

소리 없는 재앙의 예감(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어떤 사람은 매혹당할 운명으로 태어나 문학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매혹시킬 것을 찾아서 헤맨다. 문학을 헤매는 것은 여행지를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문학이라는 외국에서 영영 머문다. 독자란 끝내 알지 못할 것을 가장 사랑하며, 일생 동안 그것이 그리워 우는 존재이다. 만약 그 신비의 제단에 우연히, 혹은 누군가의 손길에 끌려 아주 잠깐 발을 들이게 되면, 우리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종류의 글에서,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싶어질 것이다.(144쪽, 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문학동네, 2017. 옮긴이의 말 중에서) * 그렇게 배수아는 썼다. 나를 포함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수많은 '제발디언'들을..

흔해빠진독서 2021.08.08

헤르만 헤세, 『헤세가 사랑한 순간들』, 을유문화사, 2015.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적어도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할아버지 집에 있던 책장의 거의 모든 책들은 고모의 것이었는데,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지만 주로 철학 서적과 소설책들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종이로 씌워진 책등에 볼펜으로 멋들어지게 제목을 써놓았고, 나는 할아버지의 필체로 쓰여진 책들의 제목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오로지 제목만으로 상상해보는 것을 즐겼다. 그렇게 바라보던 책 중에 헤세의 '데미안'이나 '유리알 유희', '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소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헤르만 헤세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의 소설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급기야 '유리알 유희'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소설을 읽어..

흔해빠진독서 2016.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