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한길사, 2018.

시월의숲 2019. 6. 9. 00:18

그는 아기를 볼 때마다 도대체 이 아기가 어디서 왔을까 종종 의문이 들곤 했다. 어머니가 수태하기 전에 아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지금 그의 소망은, 아기가 나타났다가 너무나 짧은 찰나를 머물다 가버렸거나 아예 처음부터 나타나지도 않았거나,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둘은 차이가 있다. 엄지손가락으로 그는 매끈매끈한 외투 단추를 만지작거린다. 삶과 죽음 사이의 차이를 측량할 만한 그 어떤 척도도 없기에, 그 어리디 어린 아기의 죽음은 다른 모든 죽음과 마찬가지로 오직 절대적일 뿐이다. 그 자신의 직업이기도 한 측량을 이날 아침처럼 무용하게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상이 다만 의복에 지나지 않음을 인식하게 된 지금, 그는 일상을 다시 걸쳐야 할 것인가.(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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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망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 여부가 언제 확정되는지 인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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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자신을 베어내는 도끼에게 스스로를 바친다. 누구나 후손을 위해 자신을 소모시킨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성장이 가능해진다. 이루어진다. 늙은 어머니는 딸에게 자신에게서 탈출하는 길을 선물했고, 그 길은 딸을, 현재의 상태대로라면, 멸망으로 이끌었지만, 그 덕분에 손녀들은 아마도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뒤쳐질 운명으로 태어나고, 많은 이들은 떠나야 할 운명, 그리고 세 번째는 도달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게 삶이다.(107~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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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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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굶주림과 추위에서 살아남는 문제에만 집중하게 되면 모든 인간은 동작과 행위의 동일한 절약상태로 돌입하게되는데,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동물이던 시기부터 다들 가진 공통점일 것이고, 그래서 인간과 인간을 구별 짓는 모든 특징이 사치라는 것을, 급작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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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항상 말하지 않았던가, 연극 무대에 등장한 총은, 극 중에서 반드시 한 번은 누군가가 발사한다고. 그녀는 입센의 희곡 「들오리」를 떠올리고, 마침내 총성이 울리는 순간 자신이 눈물을 흘렸던 것을 기억한다. 아마도 그녀는 해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희망을 품고 앉아 있는 것이고, 그러니 적당한 어휘를 고르려고 이토록 오랜 시간을 고심하는 게 아닌가. 아마도 그녀는 해낼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는 글쓰기를, 몇 마디 어휘로 삶의 흐름을 어느 정도 더 길게 연장하거나, 최소한 덜 힘겹게 만드는 것을. 자신을 다시 삶으로 되돌려 놓는 글쓰기를. 지금 그녀는 그 이상의 것을 바랄 수 없다. 그런데 적당한 어휘라니,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진실을 쓰면 그녀의 삶이 더 넓게 확장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무수히 존재하는 가능한 진실이나 거짓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는, 누가 이 글을 읽게 될지조차, 알 수 없다.(153~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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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사랑이 빠진 후에야 그녀는, 누군가의 아는 존재가 되기를,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와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그동안 얼마나 갈망하면서 살아왔는지를 깨달았다. 그녀가 항상 비밀리에 자신의 죄로 명명하던 모든 것, 저질렀거나, 상상했거나, 타고났거나, 욕망한 것들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그녀의 모든 치욕의 원천을 들은 다음 웃어넘겼고, 그것들의 위협 가능성마저도 웃어넘겼다. 사랑은 말할 수 있음을 의미했고, 말할 수 있음은 자유였으며, 영영 부족한 존재인 것만 같은 그녀의 두려움은, 생전 처음으로 사라졌다.(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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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마지막으로 일어난 많은 일을, 마지막이라고 호명해주지도 않고, 그대로 삭제해버리고 만다. 언젠가 어머니는 그녀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올려 묶어주었다. 언젠가 그녀는 부엌 식탁에서 동생이 숙제를 하는 동안 마지막으로 설거지를 했다. 언젠가 그녀는 마지막으로 붉은 양귀비 카페에 앉아 있었다. 일생 동안 그녀는, 그것이 마지막인지도 모른 채, 셀 수도 없이 여러 번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했다.(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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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러면 언젠가 내 몸도 시체가 되는 거야?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 몸의 모든 얼룩과 흉터, 피부, 머리카락, 정맥 전부가? 그렇다면 결국 난 일생 내내 내 시체랑 같이 살아간다는 말이잖아, 안 그래? 자라고, 늙고, 그래서 언젠가 내 시체가 완성되면, 그러면 죽는단 말이야?

어머니가 이제는 벽시계의 태엽을 감지 않기 때문에, 집 안은 평소보다 더욱 고요하다.

빈틈없이 측량된 이 세계에서 그는 혼자다.(2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