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25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등), 은행나무, 2024.

내가 쐐기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쐐기풀 차가, 산책길에 한 아름씩 꺾어오는 불가리스 쑥이, 여름 내내 어디에나 지천인 황금빛 골드루테 다발이 이 오두막의 삶에서는 아주 두드러지는 사건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루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15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  우리는 어떤 돌연한 사건과 마주치고, 그것을 스쳐 지나가고, 그런 후 그에 대한 생각에 잠긴 채 살아가게 되겠죠.(23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  *  내가 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면, 그 말은 내 편지가 나를 영영 떠난다는 의미였다. 내게서 나온 말은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혹은 나는 기억을 상실한 말과 다름없게 되리라. 그리하여 수십 년이 흐른 후..

내가 쓴 편지들이 나를 다시 이끄는 것을

나는 오래전에 충동에 사로잡혀 썼던 편지들을 떠올렸고, 그 편지들은 타이프라이터가 아니라 손으로 쓴 것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수치심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이어서 그는 썼다.  '내가 쓴 편지들이 나를 다시 이끄는 것을 느꼈다. 그것들은 몸을 잃은 영혼과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우체부가 되어 내 편지를 다시 찾아오고 싶었다.'  나 역시, 오래전에 충동에 사로잡혀 썼던 편지들을 떠올렸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수치심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나는 설사 우체부가 된다 하여도 그 편지를 찾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 편지는 부친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전해 준 편지였으므로. 나 스스로가 이미..

어느푸른저녁 2024.11.12

속삭임 우묵한 정원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10쪽)  *그리고 그는 자신을 보는 그것을 쓴다. 바로 자신을 보는 그것이 되어.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에 대한 글이자, 그 속삭임의 근원일지 모르는 자신의 '우묵한 정원'에 대한 글이다. 누군가는 동어반복일 뿐이라고 힐난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편지.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발신인 없는 편지'에 대한, 결국 나에게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에 대한 글. 나는 이 소설이 마치 이 소설 바로 전에 나왔던 작가의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의 소설 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작별들과 순간들 중의 한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그는 《작별..

흔해빠진독서 2024.09.25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연인』을 다시 읽었다. 책표지는 장자크 아노의 필름 한 장면이었다. 속표지에서 번역자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취리히에 있는 R에게 편지를 썼고, 베를린의 책장을 뒤지다가 우연히 당신이 번역한 『연인』을 찾아내서 읽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나는 오래전 대학 시절에 읽었으므로 당연히 이 책을 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다시 읽으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첫 페이지를 펼쳐든 순간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었노라고. 내가 삼십 년 전 모국어로 읽었던 당시에는 이 책이 내용이 아니라 언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과거에 내가 읽은 것은 다른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썼다.(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중에서) *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작별들 순..

흔해빠진독서 2024.03.18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우리는 밤으로 화해하기를 원하니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 엘제 라스커 쉴러, 중에서(시집,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수록) * 그러니까 이 시집은 사랑에 관한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열정에 도취해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시집을 나는 배수아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시집이 가진 뜨거움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나와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것은 매번 놀라움과 신기함을 안겨주었으나 때로 감당하기 벅찬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집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말까지 읽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느낀 그 벅찬 느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옮긴이의 말을 옮겨본다...

흔해빠진독서 2024.01.01

나는 푸른 죽음을 우네

그냥 집에서 쉴까 생각했다. 하지만 창으로 비춰드는 햇살이 너무나 유혹적이어서, 저 햇살을 맞으며 걷고 싶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시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 중에 저 시월의 햇살과 공기도 있을 테니. 나가기로 마음먹었으니 이제는 어디로 갈까 정해야 했다. 가까운 민속마을이라도 갈까 아니면 가끔씩 가곤 하는 절에 갈까. 짧은 고민 끝에 그냥 집 근처에 있는 저수지 주위를 걷기로 했다. 3킬로미터 조금 넘는 저수지의 둘레길을 걸으면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린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 천천히 걸으면서 아쉬운 이 가을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자, 생각하면서. 구름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파란 하늘은 정말 눈부시다고밖에 표현할 길 없었다. 저..

어느푸른저녁 2023.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