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30

바우키스의 말

"이승과 그리 멀지 않은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 봐 겁났던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가 뒤에 오는지 봤다. 아내는 팔을 뻗어 남편을 안으려 했지만 그 안타까운 손은 허공만 잡을 뿐. 다시 죽은 그녀는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사랑이 무슨 죄겠는가? 그녀는 그에게 닿을 수 없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다시 저승으로 내려갔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중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본 후 나는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떠올렸다. 아니다.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읽고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최근에 본 그 영화가 떠올랐다는 게 맞는 말이다.(물론 선후 관계가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게 있다면 영화가 소설을, 소설이 영화를 생각나게..

흔해빠진독서 2025.01.25

배수아 - 모공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대사...하이너 뮐러의 희곡은 "읽어야" 한다

오직 감탄하게 되는 언어가 있다. 줄거리에의 몰입, 적당한 정서적 공감, 독서 배경이 뒷받침되는 지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오직 언어 자체에 매혹당하는 체험.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잘 알게 되기도 전에, 짧고 순간적일지라도 거의 육체적으로 느껴지는 전율의 체험. 내게 그런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작가 중 하나는 하이너 뮐러이다. 하이너 뮐러는 희곡작가로 알려졌지만 그가 남긴 산문과 시도 희곡 못지않게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뮐러의 희곡이 정치적인 의미나 미학적인 수준에서 비평가들의 관심을 너무도 많이 차지해버리는 바람에 도리어 그의 시나 산문들이 합당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보는 평가도 있다. 그의 산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산문의 개념과는 좀 동떨어진 것이 많다. 길이가 극도로 짧으면서 막간극을 연상시키는..

배수아 - '내 이익을 해치는 자는 죽여도 좋다'는 나치즘을 고발했다 금서가 된 '이 책'

나는 서른네 살의 김나지움(독일의 중등 교육기관) 교사이다. 열네 살 난 소년 스물일곱 명에게 역사와 지리를 가르친다. 나는 부유하지 않고 나이 든 부모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편이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심한 불안의 시대에 종신연금이 보장되는 공립학교 교사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 학생이 쓴 작문이 발단이었다. 감독관청에서 내려온 주제인 '독일은 왜 식민지를 가져야 하나?'로 쓴 작문이다. 학생 N은 이렇게 썼다. “검둥이는 모두 교활하고 비열한 데다 게으르기만 하다.” 나는 이것을 읽는 순간 당장 붉은 잉크로 삭제하고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지 지적을 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는다. N의 ..

배수아 - 조현병 아들, 떠나간 애인…브라질의 ‘여성 카프카’는 고립 속에 이 신비한 소설을 썼다

새로운 종류의 여행법을 나는 독일 베를린 서가의 주인에게서 배웠다. 그것은 죽은 작가와 책을 향해 떠나는 여행, 여행을 통한 읽기이다. 그의 여행이 책이나 작가, 혹은 예술작품으로부터 유발되지 않은 경우란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의 브라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2015년 우리는 상파울루 공항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내게 한 권의 책을 건넸다. 내가 거기 있으므로, 거기서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했다. 이유는 그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서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작가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제목의 책이었다. 첫 페이지에는 짧은 작가의 말이 있었다. 그 첫 문장은 이랬다. “이것은 수많은 다른 책들과 다르지 않다.” 이 문장이 초대인 동시에 경고라는 ..

바서부르그의 열흘

2007년(무려!) 가을호인 《작가세계》는 배수아 특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이라는 배수아의 산문이 실려 있는데, 작가가 독일의 바서부르그에 머물면서 마르틴 발저를 만나러 간 일화가 나온다. 그는 발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태도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서둘지 않았고, 상대편에게 말이나 해명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도 해명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유머가 있는가 하면 너그러운 면모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는다.   '세월이 흐르면 그 기억들이 자연스레 희미해지겠지만, 그때 나는 너무나 슬플 것이다'  나는 《작별들 순간들》에서도 그랬지만, 그가 말하는 숲과 정원이, 그가 말하는 바서부르그가, 베를린이, 나아가 독일이라는 나라가 특별하..

흔해빠진독서 2025.01.01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등), 은행나무, 2024.

어느 날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글에서, 바우키스가 나무로 변하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으나 물과 바람과 풀과 햇빛과 새소리 그 마지막 느낌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라는 구절을 읽었다. 아마도 그 구절이 〈바우키스의 말〉의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마치 가장 마지막 구절로만 이루어진 하나의 단편처럼, 〈바우키스의 말〉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최후의 순간에 말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쓰기 시작했다.(16쪽, 수상소감 중에서)  *  나는 쓴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을 향해 귀 기울이면서. 바우키스의 말, 누군가 그것을 들었을까.(16쪽, 수상소감 중에서)  *  내가 쐐기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쐐기풀 차가, 산책길에 한 아름씩 꺾어오는 불가리스 쑥이, 여름 내내 어디에나 지천인 황금빛 골드..

내가 쓴 편지들이 나를 다시 이끄는 것을

나는 오래전에 충동에 사로잡혀 썼던 편지들을 떠올렸고, 그 편지들은 타이프라이터가 아니라 손으로 쓴 것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수치심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이어서 그는 썼다.  '내가 쓴 편지들이 나를 다시 이끄는 것을 느꼈다. 그것들은 몸을 잃은 영혼과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우체부가 되어 내 편지를 다시 찾아오고 싶었다.'  나 역시, 오래전에 충동에 사로잡혀 썼던 편지들을 떠올렸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수치심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나는 설사 우체부가 된다 하여도 그 편지를 찾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 편지는 부친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전해 준 편지였으므로. 나 스스로가 이미..

어느푸른저녁 2024.11.12

속삭임 우묵한 정원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10쪽)  *그리고 그는 자신을 보는 그것을 쓴다. 바로 자신을 보는 그것이 되어.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에 대한 글이자, 그 속삭임의 근원일지 모르는 자신의 '우묵한 정원'에 대한 글이다. 누군가는 동어반복일 뿐이라고 힐난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편지.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발신인 없는 편지'에 대한, 결국 나에게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에 대한 글. 나는 이 소설이 마치 이 소설 바로 전에 나왔던 작가의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의 소설 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작별들과 순간들 중의 한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그는 《작별..

흔해빠진독서 202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