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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럽지만 그리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세계이기를

무메이는 '괴롭다'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양 기침이 나오면 기침을 하고, 음식이 식도로 역류하면 토할 뿐이었다. 물론 아픔을 느끼지만 요시로가 아는, "왜 나만 이리 괴로워야 하지." 같은 우는소리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고통이었다. 그것이 무메이 세대가 부여받은 보물일지도 몰랐다. 무메이는 스스로 불쌍하다고 여기는 기분을 모른다.(41쪽,「헌등사」 중에서) *이것은 분명 디스토피아다. 하지만 암울하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인가? 아니, 유토피아는 아니다. 이것은 재앙이다. 무언가를 거스른 결과다. 자연스럽지 못한 이변의 풍경이다. 그것은 인간이 초래했지만 인간 아닌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이 떠안아야 할 난감한 현실이다. 실제 일본에서 있었던 원전 유출 사고와 대지진을 모티브로, 그 이후의 세계를 ..

흔해빠진독서 2026.10.05

단상들

* 내가 당신을 위해 했던 것들이 실은 당신이 나를 감내해 주는 일이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내가 한 일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20260914) * 직장 동료가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어보길래, 다와다 요코의 『헌등사』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와다 요코라는 이름과 헌등사라는 책의 제목을 입 밖으로 내뱉자마자 마치 그것을 설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는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물론 우리들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20260915) * 마라탕 혹은 마라샹궈라는 음식은 몸에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나는 저 두 음식을 가끔씩 시켜서 먹을 정도로 싫어하지는 않는데(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다), 항상 먹을 때..

입속의검은잎 2026.09.30

다와다 요코, 《헌등사》, 민음사, 2024.

눈을 뜨니, 아침 햇살이 민들레 녹은 듯이 노랗게 흘러 들어온다.(9쪽, 「헌등사」 중에서) * 나무의 몸속에는 세월이 파문을 이루며 남아 있는데, 자기 체내에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시간이 보존되어 있을까? 나이테처럼 파문을 확대하거나 일직선으로 배열하는 방식도 아닐 테니, 정리되지 않은 서랍 속처럼 어지럽게 쌓여 있지는 않을까.(13쪽, 「헌등사」 중에서) * "고등학생일 때는 그리스 조각상 같은 몸이 부러웠어요. 미대를 지망했거든요. 언제부터인가 전혀 다른 몸이 좋아졌죠. 새나 문어 같은. 한번 모든 것을 타자의 눈으로 보고 싶어요.""타자요?""아니, 문어요. 문어의 눈으로 보고 싶어요."(21쪽, 「헌등사」 중에서) * 무메이는 '괴롭다'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양 기침이 나오면 기침을 ..

그럼에도 내일이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

* "그래요, 우린 비명을 지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잠을 못 자고요. 그럼에도 내일이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199쪽, 「벌집과 꿀」 중에서) *멀리 있다.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하다가 이곳으로 흘러왔는지 알 수 없다. 어떤 감각만이 몸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멀리 있다는 느낌.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느낌, 감각만이. 멀리 있다는 느낌은 원래 내가 누군가로부터, 어딘가에서 비롯되었다는 원초적인 인식으로부터 촉발되는 것이겠다. 나의 뿌리, 내 원형, 내가 생겨난 이유 같은 것.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져 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 흘러 아주 먼 곳으로 떨어져 나와버렸다. 눈을 떠보..

흔해빠진독서 2026.09.20

단상들

*때로 내 삶이 문장과 문장의 이어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내뱉은 말과 말들의 이어짐이 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20260830) * 숙제란 참으로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물론 숙제를 하지 않은 적도 많지만). 하지만 어떻게든 하고 나면 홀가분함은 상상 이상이다.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누가 숙제를 주는가? 이상하지, 인생이 자꾸만 숙제처럼 느껴진다.(20260831) * 단편 소설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도저히 쏟아지는 잠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손에 든 채 잠시 머리를 뒤로 젖혔을 뿐인데. 아무래도 소설은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어떤 소설을 읽다가 잠이 들면, 그 잠에, 그 소설이 조금 섞이지..

입속의검은잎 2026.09.14

건강하시기를

어제 벌초를 했다. 매년 하는 일인데, 금방 돌아오는 것 같다. 하기 전에는 힘듦이 예상되기 때문에 힘들고, 막상 하고 나면 숙제를 하나 끝낸 것 같아 홀가분해진다. 그래도 올해는 작년에 비해 덜 더워서 좋았다.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뜨겁고 습했던 올여름을 생각한다면, 갑작스러운 이 선선함이 적응이 안 될 정도지만, 벌초를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이상하게도 올해는 날씨도 그렇지만(날씨 때문에 그런 걸까?) 산소를 올라가는 길이 작년보다 수월하게 느껴졌다. 매년 실제로 하는 벌초보다도, 벌초를 하기 위해 산소까지 가는 길이 더 어렵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올해는 작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작년에 비해 쉽게 간 것 같아 의아했다. 선선한 날씨 탓일 수도 있고, 작년에 비해 풀들의 우거짐이 덜..

어느푸른저녁 2026.09.13

폴 윤, 《벌집과 꿀》, 엘리, 2025.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갈망이라는 감정을 느낀 순간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다.(21쪽, 「보선」 중에서) * 그가 거기 달빛 속에, 카로의 곁에 긴장을 풀고 가볍게 서 있는 동안, 공기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고, 바람이 불었고, 그는 갑자기 자신이 아주 먼 길을 왔으며 무언가 굉장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리라는 걸, 오늘 밤이나 내일을 아닐지 몰라도 머지않아 일어나리라는 걸 느꼈다.(53쪽, 「보선」 중에서) * 거기 있는 빈터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 해골을 본 거야. 죽을 때 입고 있던 갑옷을 그대로 입고 있더라고. 그리고 내가 뭘 봤는지 알아, 유미? 그 해골 입에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있었어. 어린 벚나무였어. 신기하지 않니? 우린 이 생을 살다가 또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거..

단상들

* 갑작스러운 혹은 갑작스러워 보이는 불행은, 다른 종류의 불행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사실상 매일매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흰 두부처럼 잘린 그것을 임의로 한 조각씩 나누어 가질 뿐이다.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배수아, 「눈먼 탐정」 중에서) 갑작스러운 불행은, 사실상 매일매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 그렇다면 지금 내게 닥친 불행은 임의로 한 조각 내게 나누어진 것일 뿐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내 몫의 불행은 내가 감내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20260815) *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끼니는 꼭 챙겨 먹어야만 한다. 그래서 아버지와 있으면 내 배가 꺼질 일이 없다. 배가 터질 것 같다고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정..

입속의검은잎 2026.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