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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윤, 《벌집과 꿀》, 엘리, 2025.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갈망이라는 감정을 느낀 순간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다.(21쪽, 「보선」 중에서) * 그가 거기 달빛 속에, 카로의 곁에 긴장을 풀고 가볍게 서 있는 동안, 공기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고, 바람이 불었고, 그는 갑자기 자신이 아주 먼 길을 왔으며 무언가 굉장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리라는 걸, 오늘 밤이나 내일을 아닐지 몰라도 머지않아 일어나리라는 걸 느꼈다.(53쪽, 「보선」 중에서) * 거기 있는 빈터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 해골을 본 거야. 죽을 때 입고 있던 갑옷을 그대로 입고 있더라고. 그리고 내가 뭘 봤는지 알아, 유미? 그 해골 입에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있었어. 어린 벚나무였어. 신기하지 않니? 우린 이 생을 살다가 또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거..

단상들

* 갑작스러운 혹은 갑작스러워 보이는 불행은, 다른 종류의 불행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사실상 매일매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흰 두부처럼 잘린 그것을 임의로 한 조각씩 나누어 가질 뿐이다.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배수아, 「눈먼 탐정」 중에서) 갑작스러운 불행은, 사실상 매일매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 그렇다면 지금 내게 닥친 불행은 임의로 한 조각 내게 나누어진 것일 뿐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내 몫의 불행은 내가 감내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20260815) *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끼니는 꼭 챙겨 먹어야만 한다. 그래서 아버지와 있으면 내 배가 꺼질 일이 없다. 배가 터질 것 같다고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정..

입속의검은잎 2026.08.30

내 마음 속 황야를 살피는 일

이 책을 사놓고 오래 묵혀두었다. 묵혀 두었다는 말이 맞을까. 그저 잊고 있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문득문득 내 시야에 들어왔고, 나는 책장에서 이 책을 꺼냈다가 한 번 들춰본 후 다시 꽂아 놓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결심을 하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결심이라는 말에는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그렇다기보다는 그저 자연스럽게 읽기 시작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매번 입버릇처럼 하는 말, 이번에는 이 책을 읽을 때였을 뿐이라는 것. 왜 지금인가,에 대해서 따지고 들 필요는 없다. 나 역시 알 수 없고, 나는 내 마음의 행방을 그저 따라갔을 뿐이니까. 왜 수많은 책들 중에 지금 이 책을 읽는가에 대한 핑계처럼 느껴지지만, 모든 ..

흔해빠진독서 2026.08.29

윤여일, 《여행의 사고》, 돌베개, 2012.

낯선 대상을 범박하게 처리하는 개념이 되고 말까봐 아껴두었지만, 여행은 '타자'에 대한 시선을 바꿔놓을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추상적으로 흐를까봐 저어되는 말이지만, 세계를 규모가 아니라 무수한 질적 경계와 차이,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내는 사건들로 보도록 이끌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체험, 곧 그 낯설음과의 만남을 위해서는 만남의 맥락을 스스로 구성해야 하는 힘겨움이 따드리라.(41~45쪽) * 그러나 역시 정작 적어보고 싶은 것은 내가 원하는 여행이다. 나라 단위가 아니라 마을 단위에서 생활 감각을 체험하는 여행, 자신의 감각과 자기 사회의 논리를 되묻게 만드는 여행, 현지인의 목소리를 듣지만 그것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여행, 카메라를 사용하되 그 폭력성을 의식하는 여행, 마음의 장소에 다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그 이후의 추억을 새롭게 쌓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빌런 아닌 빌런, 진 그레이도 좋았지만, 어쨌건 피터 파커에게 가장 중요한 건 MJ가 아니던가. 그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삶에서 그녀를 지워보려 하지만 그게 잘 될 리가 있나. 그녀가 사라졌으면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의 앞에 버젓이 살아있는데. 단지 그들이 함께 한 기억만이 사라졌을 뿐인데. 그것도 내 기억이 아닌 내 연인의 기억만이. 그런 생각도 했다. 머릿속의 기억이 사라지면 몸의 기억도 다 사라지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와 함께 뉴욕 상공을 가로지르며 날아다니던 감각마저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인지. 하지만 우리의 스파이더맨은 씩씩하다...

봄날은간다 2026.08.16

단상들

* 가만 보면 스스로를 피곤 속으로 몰아가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몸에 힘을 빼고, 마음에 여유를 가지자.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다.(20260803) * 더워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작년에도 이렇게 더웠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다. 진정 여름형 인간들이 부럽구나.(20260805) * 그냥 내가 먼저 인사를 하면 되는데 왜 자꾸 꼰대력이 발동하는지 모르겠다. 무시당한다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상대방도 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할지 모르는데! 무시를 무시하면 될 일이다. 너는 무시해라, 나는 인사한다, 뭐 그런 마인드로. 받아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런 생각조차도 내가 덜 상처받기 위한 방어기제가 아닐까 의심한다. 뭐 그렇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20260806..

입속의검은잎 2026.08.15

의심과 불안의 이중주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에 실려 있는 4편의 단편 모두 어떤 의심에 대한 이야기다. 의심이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을 때, 우리의 내면에 조금씩 싹을 틔워 어느샌가 거대한 덩굴로 자신의 온몸을 옥죄게 되는 그런 것이다. 의심은 불안을 야기한다. 우리는 의심하고, 불안에 빠지고, 그 불안 속에서 더욱 의심한다. 일면 악몽과도 비슷하다. 그런데 꿈이란 깨어남을 전제로 하지만, 의심이란 어떤가? 의심은 끊임없는 의심을 불러올 뿐이다. 끊임없는 불안을 일으킬 뿐이다. 의심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냔 말이다. 이디스 워튼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의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4편의 단편 모두 한없는 의심 속에서, 진실과 거짓의..

흔해빠진독서 2026.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