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5

당연하고도 힘차게, 쓸쓸한 자는

이 책은 제발트가 인상 깊게(본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읽거나 본 여섯 명의 작가들(소설가이거나 화가)에 대한 글이다. 요한 페터 헤벨, 장-자크 루소, 에두아르트 프리드리히 뫼리케, 고트프리트 켈러, 로베르트 발저, 얀 페터 트리프가 그들이다. 내가 한 번이라도 이름을 들어보거나 읽었던 책의 저자라고 한다면 고작 장-자크 루소와 로베르트 발저뿐이다. 그래서일까? 다른 작가들보다도 그 둘에 관해서 쓴 글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로베르트 발저는 나 역시 흠모해 마지않는 작가여서 제발트가 그에 대한 애정을 품어왔다고 고백하는 대목에서는 마치 운명의 이상형을 만난 것 같은 친밀함을 느꼈다. 이로 인해 나는 제발트뿐만 아니라 발저 역시 더욱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되었다. 배수아는 '제발디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

흔해빠진독서 2024.04.07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라면

"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111쪽,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얼마만의 하루키인가. 그는 그가 꾸준히 했던 마라톤만큼이나 책을 내고, 그 책들은 꾸준히 하루키 스타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며 그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은 독자들은 대체로 '여전하다'는 평이 많은 것 같은데, 그것은 찬사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그래, 하루키는 하루키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는 '..

흔해빠진독서 2023.11.19

이토록 평범함 미래라니

똑같은 투덜거림을 하기는 정말 싫었다. 하지만 나는 또 매번 하던 투덜거림으로 시작을 해야 할 것 같다. 글을 쓰기도 전에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과, '할 것 같다'라는 모호한 말을 쓰는 것조차 너무나도 싫지만. 싫어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글쓰기라는 것도 있는 거겠지 세상엔. 어쨌거나 김연수의 비교적 최근작인 『이토록 평범함 미래』를 읽었다. 사실 읽은 지는 꽤 되었다. 늘 그랬듯 지금의 나는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느낌만이 미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느낌이란, 그의 소설이 으레 그러하듯 절망적이지만 결코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긍정적이고 따뜻한 종류의 것이었다. 오랜만에 나온 이번 소설집은 이전보다 화려하고 재기 발랄하지는 않지만 한층 깊어진 느낌이었다. 좀 나..

흔해빠진독서 2023.10.18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서 단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할지라도, 그래서 거의 그것을 잊은 채로 지내더라도, 언젠가는 책이 먼저 말을 걸어줄 것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때까지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거의 그것을 잊은 채로. * 나는 저 문장을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을 읽은 지 7년 만에 썼다. 처음 읽고 나서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했지만, 무슨 조화인지 무려 7년 만에 나는 그 소설이 다시 생각이 났고,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쓰게 된 것이다. 그 책처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배수아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를 올해 초에 읽고 지금까지 어떤 말도 쓰지 못했다. 『자화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을 내 책상 위 보이는 곳에 늘 놓아두었다는 것이다. 그..

흔해빠진독서 2022.08.30

소리 없는 재앙의 예감(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어떤 사람은 매혹당할 운명으로 태어나 문학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매혹시킬 것을 찾아서 헤맨다. 문학을 헤매는 것은 여행지를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문학이라는 외국에서 영영 머문다. 독자란 끝내 알지 못할 것을 가장 사랑하며, 일생 동안 그것이 그리워 우는 존재이다. 만약 그 신비의 제단에 우연히, 혹은 누군가의 손길에 끌려 아주 잠깐 발을 들이게 되면, 우리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종류의 글에서,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싶어질 것이다.(144쪽, 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문학동네, 2017. 옮긴이의 말 중에서) * 그렇게 배수아는 썼다. 나를 포함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수많은 '제발디언'들을..

흔해빠진독서 2021.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