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117

위키드

뮤지컬로 보지 못한 '위키드'를 영화로 보았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보았는데, 뮤지컬 특유의 흥겨움과 멋진 넘버들은 예상했던 바이지만, 인간의 여러 가지 면모를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글린다도 그렇고 피예로나 보크도. 다소 얄팍할지라도, 오히려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특히 파티 장면에서 단체로 춤을 추며 외치던, 먼지 같은 삶이니 노래나 부르고 춤이나 추자는(뭐 대충 그런 말이었던 것 같다) 말이 기억에 남는다. 뮤지컬이라면 응당 그런 요소들을 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때도 없지 않은가!  결국 엘파바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마법사로 성장하게 되지만,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마법은, 너무나도 다른 저 두 사람이..

봄날은간다 2024.11.23

룸 넥스트 도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룸 넥스트 도어》를 보았다. 내가 사는 곳의 메가박스에서는 오늘 고작 1개 상영관에서 단 두 번 상영을 했다. 놓쳤으면 아마 한참 뒤에 봤거나, 보지 못하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영화관은 나를 포함해서 단 두 명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를 본다. 오래전에 그의 《그녀에게》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 《나쁜 교육》을 봤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어렸을 적 트라우마로 고통받던 남자가 자신을 고통에 빠트린 사람을 찾아가 복수를 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암튼 영화가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무척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다. 이번 영화는 감독의 첫 번째 영어 영화라고 하는데, 배우가 무려 틸다 스윈튼과 줄리앤 무..

봄날은간다 2024.10.27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1은 덜컹거리면서도 응축된 감정의 폭발이 매력적인 영화였다. 이번에 나온 조커 2편이라 할 수 있는 '폴리 아 되'에서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물론 1편에서 인상적으로 보여준 조커의 내면세계를 어떤 식으로 더 보여줄 수 있을까에 관심이 가긴 했다. 하지만 는 조커의 내면을 더 파고들지도 못했고, 조커를 둘러싼 사건의 양상을 좀 더 재미있게 만들지도 못했다(할리 퀸이라는 특급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조커와 아서 플렉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결국 이도저도 아닌 영화를 만들어내고 말았다(아서 플렉이 조커이고 조커가 아서 플렉이지만, 영화는 자꾸 이 둘을 갈라놓으려 한다.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은 그게 아닐까?). 뮤지컬이라는 형식과 그에 따라 선택된 노래들은 매우 ..

봄날은간다 2024.10.09

공작

파블로 라라인이라고 하는 칠레의 영화감독이 만든 뱀파이어 영화 《공작》을 보았다. 감독 이름이 생소하여 필모를 찾아보니, (아직 보지 못했지만) 《스펜서》와 《재키》의 감독이기도 했다. 어쨌든 뱀파이어 영화라는 것만 알고 보게 된 이 영화는 생각보다 독특했고 때로 우아했다. 흑백 영화이기에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흡혈귀라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역사에 대한 우화(풍자극)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이백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대를 풍미하며 살아온 그가 죽음을 결심하지만 결국 흡혈귀라는 본성에 따라 다시 피와 심장을 갈아 마시며 생명을 이어간다는 이야기다. 수많은 학살과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부유하게 살던 피노체트, 결국 돈 때문에 그를 죽이..

봄날은간다 2024.10.05

베테랑 2

추석 연휴 동안 가족들과 류승완 감독의 를 보았다. 1편도 가족들과 함께 본 것 같은데... 아무튼, 우리나라 형사물 특유의 촌스러움은 있었지만, 소재는 시의적절해 보인다. 영화의 사전정보를 전혀 알지 못한 채(특히 악역) 보아서인지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다만 '정의'와 관련된 묵직한 주제에 비해 결말은 다소 아쉬웠다. 악역보다 더욱 불편했던 것은 자칭 '정의구현' 유튜버였다. 돈에 눈이 먼 그들은 거짓을 퍼뜨리고, 선동하고, 어지럽힌다. 나는 그게 무엇보다 무서웠다.

봄날은간다 2024.09.29

"질투는 썩는 것처럼 끔찍한 감정이지. 속을 다 꼬고 뒤집어 놓거든. 그게 얼마나 아픈지 난 알아. 인생을 쉽게 사는 사람을 보면 그런 감정이 느껴지거든. 왜냐면 사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 타이 웨스트 감독, 영화 《펄》 중에서 * 공포영화가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자 최근에 공포영화를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언가에 집중할 수 없는 날들이지만, 그래서 더욱 공포영화여야만 했다. 영화 속 공포로 현실에서의 내 정체 모를 두려움을 누르고 싶었다. 잠시나마 잊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타이 웨스트 감독의 이라는 영화였다. 제대로 된 선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가 공포스럽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원한 공포는 보다 날이 서고, 감각적이며, 잔인해야만 했는데, 이..

봄날은간다 2024.07.08

파묘

를 보고 왔다. 어째 장재현 감독의 영화는 나올 때마다 영화관에서 보게 된다. 감독 때문에 영화를 보기보다는 영화의 소재나 내용에 흥미가 생겨서 보는 경우가 많은 나로서는 참으로 특별한 일이다. 물론 영화가 마음에 들면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만큼 그는 흥미로운 소재들을 적절히 가다듬어 재밌게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이번에 본 도 그랬다. 얄궂게도, 내심 기대했던 는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좀 맥이 빠졌는데,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본 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누가 뭐래도 끝까지 파는' 것이다! 무속 신앙이나 한국적인 오컬트 같은 것에 무지한 나로서는 영화에서 그려지는 오컬트적인 것들이 어디까지 맞고 어디까지 말이 안 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 그런..

봄날은간다 2024.02.25

꿈 없이 빛 없이

'너무 많이 아는 자는 아직 알지 못하는 자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직 알지 못하는 자는 너무 많이 아는 자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 - 이동진, 중에서(『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수록) 문득 책장을 훑어보다가 이동진의 두툼한 ― 어찌 보면 목침 혹은 벽돌로도 보이는 ― 영화평론집을 발견하고 꺼내 펼쳐본다(사놓고도 전혀 읽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무심히 펼쳐진 책에 가 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것을 읽는다. 몇 년 전 보았던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그가 언급한,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그 '빛'을 떠올리면서. 처음에는 그 장면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으나, 글을 다 읽고 나서야 조금씩 떠오르던, 그 빛에 대하여. 하지만 그는 이렇게 끝맺는다. 그리고 이건 이 영화의 끝(혹은..

봄날은간다 202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