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나는 오래전부터 90년대가 내 '현재'라는 이상한 시간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2024년을 살고 있지만, 90년대로 봤을 때는 미래이므로, 나는 지금 2024년이라는 미래를 살고 있다는 감각. 당시 어렸던 나는 90년대 이후의 내 삶에 대해서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미래에 무엇이 될지,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현재는 90년대에 뿌리 박힌 채 그 이후의 삶은 그저 이후의 삶일 뿐이라는 생각은 현재의 삶에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지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세상에서 마치 유령처럼 살고 있는 것만 같은 것이다! 나는 내가 맞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이 정말 실재하는 것인가? 나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과거의 나는 어느 한순간 ..

흔해빠진독서 2024.04.21

내 안의 내가 너무도 많아서

한창림은 전혀 생각해본 바 없었지만 사실, 그도 그의 아내도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될 사람들이었다. 조울증 환자인 아내, 툭하면 기이한 수컷 냄새나 풍기는 그, 둘 다 처음부터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될 사람들이었고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사람들이었다. 그도 아내도 이 사회에서, 날 때부터 괴물로 운명 지어진 존재들이었다. 의 제이슨이나 의 프레디처럼 사냥감이 되어 평생 쫓겨 다닐 괴물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괴물? 괴물의 정의는 의외로 간단하다. 사회 체계 바깥의 존재.(287~288쪽, 백민석, 『목화밭 엽기전』, 한겨레출판, 2017) * 백민석의 이 소설을 오래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선뜻 읽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읽기도 전에 느껴지는 어떤 불온하고 불길한 정서가 나를 흠칫하게 만..

흔해빠진독서 2021.09.06

소리 없는 재앙의 예감(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어떤 사람은 매혹당할 운명으로 태어나 문학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매혹시킬 것을 찾아서 헤맨다. 문학을 헤매는 것은 여행지를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문학이라는 외국에서 영영 머문다. 독자란 끝내 알지 못할 것을 가장 사랑하며, 일생 동안 그것이 그리워 우는 존재이다. 만약 그 신비의 제단에 우연히, 혹은 누군가의 손길에 끌려 아주 잠깐 발을 들이게 되면, 우리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종류의 글에서,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싶어질 것이다.(144쪽, 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문학동네, 2017. 옮긴이의 말 중에서) * 그렇게 배수아는 썼다. 나를 포함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수많은 '제발디언'들을..

흔해빠진독서 2021.08.08

블레이드 러너 2049

* 2017년에 개봉했으니 햇수로 4년 만에 이 영화를 보았다. 1편에 해당되는 가 1993년에 개봉했으나 나는 당연하게도(?) 보지 못했다. 를 보지 못했으니, 속편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궁금할 리가 없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이 영화가 궁금했다. 보고 싶었다. 속편의 감독인 드니 빌뇌브라고 하는 생소한 이름을 가진 감독의 전작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쩌면 뉴스 기사나 텔레비전에서 언급되는 SF의 고전이라 일컫는 를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속편인 의 감독인 드니 빌뇌브의 이름을, 최근에 그가 감독했지만 아직 개봉하지 않은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고. 또한 라는 이름으로 1984년에 영화화된 적이 있는 프랭크 허버트의 SF 소설 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이렇듯, 전작을 보지 못했거나, ..

봄날은간다 2021.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