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11

빛과 실(한강 - Nobel Prize lecture)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뿐일까? 책자의 뒤쪽 표지에는 1979라는 연도와 내 이름이, 내지에는 모두 여덟 편의 시들이 표지 제목과 같은 연필 필적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페이지의 하단마다에는 각기 ..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을 읽고 감상문을 쓴 후, 우연히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와 관련한 유튜브를 보았다. 과거 방송작가였다고 밝힌 유튜버는 한강의 오랜 팬이고, 자신의 방송에 한강 작가가 나와서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한강 작가의 책을 소개하며 한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바람이 분다, 가라』의 한 구절이었다.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그것이 별의 생리이자 운명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별로부터 왔다. 별들과 같은 생리와 운명을 배고 태어난 인간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다가 죽는다. 다른 것은 생애의 길이뿐이다.(17쪽) 그가 읽어주는 저 대목을 들었을 때, 나는 무언가 찌릿한 느낌..

흔해빠진독서 2024.10.20

사랑이 아니면, 사랑하지 않으면

아래는 국민서평프로젝트라는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 썼던 글의 원본이다. 그러니까 분량에 맞춰 내용을 잘라내기 전의 글이다.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더 있는 거 같아서, 저장해둔다는 의미로 여기 올려놓는다. *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다.(한강, 120~121쪽) * 아픔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에 대해서. 그 순간들은 마치 이 소설을 통해 전이되어 점차 증폭되는 듯 느껴졌으므로.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몸에 약간의..

흔해빠진독서 2021.12.06

모래의 집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 한강의 최근 소설 을 읽고 있는데, 저 문장이 나왔다. 나는 저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어쩌면 평범하고,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를, 아니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저 문장들을. 처음에는 마지막 문장에 눈길이 갔는데, 자꾸 읽을수록 첫 문장에 눈길이 머문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엄연한 사실을 자주 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가 흘러내린만큼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것일까, 그저 흘러내리고 흘러내려 종래에는 텅 비..

어느푸른저녁 2016.09.06

한강 - 효에게. 2002. 겨울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 밀려오길래 우리 몸을 지나 계속 차오르기만 할 줄 알았나 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 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 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뒤로 숨겠지 마치 내가 그 어떤 것, 바다로부터조차 널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기침이 깊어 먹은 것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저 반짝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 처음부터 모래로 지은 이 몸..

질투는나의힘 2014.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