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을 그 여자에 대하여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은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자신이 아는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화자(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여자를 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보면 그는 그 여자와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곧 그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 여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유예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끝은 마치 행성의 폭발처럼 눈부신 잔향을 남긴다. 어쩌면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리라.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다른 결말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므로.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해서 생각한다. '별의 시간'에 대해서. 이 소설에서 등..

흔해빠진독서 2024.10.20

공작

파블로 라라인이라고 하는 칠레의 영화감독이 만든 뱀파이어 영화 《공작》을 보았다. 감독 이름이 생소하여 필모를 찾아보니, (아직 보지 못했지만) 《스펜서》와 《재키》의 감독이기도 했다. 어쨌든 뱀파이어 영화라는 것만 알고 보게 된 이 영화는 생각보다 독특했고 때로 우아했다. 흑백 영화이기에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흡혈귀라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역사에 대한 우화(풍자극)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이백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대를 풍미하며 살아온 그가 죽음을 결심하지만 결국 흡혈귀라는 본성에 따라 다시 피와 심장을 갈아 마시며 생명을 이어간다는 이야기다. 수많은 학살과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부유하게 살던 피노체트, 결국 돈 때문에 그를 죽이..

봄날은간다 2024.10.05

낮의 빛은 그 꿈들을 쫓아낼 수 없다

이렇게 시작해 볼까. (사실 이건 처음은 아니다) 소설 속 작가 자신이 했던 말들로 내 글을 시작하는 것. 그것으로 내 감상을 대신 말하게 하는 것. 그러니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동시에 낯선 삶의 광경은, 내가 기억하기로, 『레티파크』 속 이야기들에 영향을 주었다. 의식한 것은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다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의미가 실린 타인들의 일상이 말이다. 당신이 글을 쓰고 있는 장소가 글에 자취를 남기고, 그 자취는 나중에야,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눈에 띈다, 늘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때로 어떤 예감들이 우리를 엄습한다. 우리 등 뒤에 누가 서 있는 듯한 느낌. 하지만 몸을 돌리면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꾼 어떤 꿈들은 하루 종일 당신을 따라다닌다...

흔해빠진독서 2024.07.17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우리는 밤으로 화해하기를 원하니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 엘제 라스커 쉴러, 중에서(시집,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수록) * 그러니까 이 시집은 사랑에 관한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열정에 도취해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시집을 나는 배수아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시집이 가진 뜨거움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나와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것은 매번 놀라움과 신기함을 안겨주었으나 때로 감당하기 벅찬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집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말까지 읽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느낀 그 벅찬 느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옮긴이의 말을 옮겨본다...

흔해빠진독서 2024.01.01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라면

"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111쪽,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얼마만의 하루키인가. 그는 그가 꾸준히 했던 마라톤만큼이나 책을 내고, 그 책들은 꾸준히 하루키 스타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며 그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은 독자들은 대체로 '여전하다'는 평이 많은 것 같은데, 그것은 찬사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그래, 하루키는 하루키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는 '..

흔해빠진독서 2023.11.19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무엇이든지 마지막이라는 것은 많든 적든 어떤 슬픔을 내재하고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그랬고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그랬다. 물론 마블 영화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하며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 안에서 각 캐릭터들의 마지막 이야기라는 것은 존재하므로, 그 시리즈의 영화들을 보면 볼수록 역시 조금은 슬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가 그저 단 한 편일 경우에는 크게 인식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의 세계관 속 각각의 이야기들이 시리즈로 만들어질수록 우리는 오랜 시간 영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커가면서 그것을 지켜보게 된다. 물론 모든 시리즈의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영화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이므로, 내가 그것에 애착을 가지는 만큼 영화가 특별해지는 것은 ..

봄날은간다 2023.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