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페일 블루 아이

"우리를 떠난 이들이 사실은 늘 곁에 있다는 거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인간은 죽음을 속이기 위해 무엇이든 하지 않나요?" - 스콧 쿠퍼 감독, 크리스찬 베일 주연, 《페일 블루 아이》 중에서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이다.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에드거 앨런 포가 등장하는데, 그가 주인공은 아니고 퇴직 형사(랜더) 역을 맡은 크리스찬 베일의 조력자로 나온다. 원작은 루이스 바야드라는 작가의 소설 'The Pale Blue Eye'라고 한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지는 꽤 된 것 같은데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 지금 보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오늘은 이걸 봐야지,하고 고른 것뿐이다. 어쩌면 에드가 앨런 포가 나온다는 사실 때문에 흥미가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이라고는 '검은 고..

봄날은간다 2026.03.23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읽는 내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는 주인공인 펄롱의 지극히 일상적인 삶과 그 삶을 둘러싼 아일랜드의 겨울 풍경을 무심한 듯 묘사하고 있지만, 수녀원을 방문한 펄롱이 우연히 한 아이를 만나는 순간부터 그 느낌은 예감이 되고, 예감은 점차 확신이 된다. 하지만 펄롱의 내면에는 드라마틱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계속 추운 겨울 아일랜드를 견디며, 석탄을 배달하는 일을 묵묵히 할 뿐이다. 결코 풍요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둔 가장으로서의 삶. 책임감 있게 일을 하는 그는, 배달을 하며 마을의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과거의 삶과 다가올 미래의 삶에 ..

흔해빠진독서 2025.09.22

책을 덮자 아주 잠시 세계가 출렁거렸다

흔히 뜬구름 잡는다는 말을 쓴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허황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김선오의 《시차 노트》를 읽고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은 뜬구름 같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그의 글이 허황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이 책의 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두 개의 단어 사이를 오가거나 두 개의 단어를 발판 삼아 멀리 가는 글쓰기. 두 단어 사이의 영향 관계를 가늠하거나 생성하기' 나는 저 문장들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 사이를 걷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허황된 일인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쓰는 단어들의 세계를 새롭게 상상하고 탐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낯선 시공간 속으로 데려다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선을..

흔해빠진독서 2025.07.06

단단

남쪽 숲에선 새끼 곰이 깨어났습니다. 자는 동안에도 키는 자랐습니다. 가슴의 흰 반달도 커졌습니다. 곰, 발톱도 길었습니다. 두껍고 새카맣습니다. 자던 자리가 동그랗습니다. 엄마 곰은 어디 가고 없습니다. 빠진 이빨들 흩어져 있습니다. 곰, 외로움 있습니까? 곰, 일어나 앉습니다. 엄마와 약속한 일이 기억납니다. 산골의 다람쥐, 멧돼지, 토끼, 뱀들도 엄마랑 약속합니다. 긴 겨울이 지나면 깨어나기로 합니다. 따뜻해지면 맛있는 것을 먹기로 합니다. 꽃이 피면 같이 놀기로 합니다. 곰, 눈 비비고 기지개도 켜봅니다. 혼자 가만히 엄마 엄마 불러도 봅니다. 곰, 두려움 알고 있습니까? 몸이 가렵습니다. 앞으로 구르고 뒤로도 굴러봅니다. 곰, 배가 고프고 목도 마릅니다. 구멍 밖에서 쑥냄새, 취냄새 향긋하게 불..

질투는나의힘 2024.11.02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을 그 여자에 대하여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은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자신이 아는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화자(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여자를 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보면 그는 그 여자와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곧 그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 여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유예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끝은 마치 행성의 폭발처럼 눈부신 잔향을 남긴다. 어쩌면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리라.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다른 결말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므로.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해서 생각한다. '별의 시간'에 대해서. 이 소설에서 등..

흔해빠진독서 2024.10.20

공작

파블로 라라인이라고 하는 칠레의 영화감독이 만든 뱀파이어 영화 《공작》을 보았다. 감독 이름이 생소하여 필모를 찾아보니, (아직 보지 못했지만) 《스펜서》와 《재키》의 감독이기도 했다. 어쨌든 뱀파이어 영화라는 것만 알고 보게 된 이 영화는 생각보다 독특했고 때로 우아했다. 흑백 영화이기에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흡혈귀라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역사에 대한 우화(풍자극)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이백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대를 풍미하며 살아온 그가 죽음을 결심하지만 결국 흡혈귀라는 본성에 따라 다시 피와 심장을 갈아 마시며 생명을 이어간다는 이야기다. 수많은 학살과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부유하게 살던 피노체트, 결국 돈 때문에 그를 죽이..

봄날은간다 2024.10.05

낮의 빛은 그 꿈들을 쫓아낼 수 없다

이렇게 시작해 볼까. (사실 이건 처음은 아니다) 소설 속 작가 자신이 했던 말들로 내 글을 시작하는 것. 그것으로 내 감상을 대신 말하게 하는 것. 그러니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동시에 낯선 삶의 광경은, 내가 기억하기로, 『레티파크』 속 이야기들에 영향을 주었다. 의식한 것은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다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의미가 실린 타인들의 일상이 말이다. 당신이 글을 쓰고 있는 장소가 글에 자취를 남기고, 그 자취는 나중에야,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눈에 띈다, 늘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때로 어떤 예감들이 우리를 엄습한다. 우리 등 뒤에 누가 서 있는 듯한 느낌. 하지만 몸을 돌리면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꾼 어떤 꿈들은 하루 종일 당신을 따라다닌다...

흔해빠진독서 2024.07.17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우리는 밤으로 화해하기를 원하니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 엘제 라스커 쉴러, 중에서(시집,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수록) * 그러니까 이 시집은 사랑에 관한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열정에 도취해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시집을 나는 배수아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시집이 가진 뜨거움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나와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것은 매번 놀라움과 신기함을 안겨주었으나 때로 감당하기 벅찬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집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말까지 읽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느낀 그 벅찬 느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옮긴이의 말을 옮겨본다...

흔해빠진독서 2024.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