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들 순간들 4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연인』을 다시 읽었다. 책표지는 장자크 아노의 필름 한 장면이었다. 속표지에서 번역자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취리히에 있는 R에게 편지를 썼고, 베를린의 책장을 뒤지다가 우연히 당신이 번역한 『연인』을 찾아내서 읽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나는 오래전 대학 시절에 읽었으므로 당연히 이 책을 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다시 읽으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첫 페이지를 펼쳐든 순간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었노라고. 내가 삼십 년 전 모국어로 읽었던 당시에는 이 책이 내용이 아니라 언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과거에 내가 읽은 것은 다른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썼다.(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중에서) *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작별들 순..

흔해빠진독서 2024.03.18

우리가 영영 작별하는 건 아니겠지요

출장을 다녀왔다. 호텔은 그 지역에서 꽤 유명한 산의 초입에 있었다. 체크인을 한 후, 주변 숲을 걸었다. 책을 들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날이 쌀쌀하여 그 생각은 이내 사라졌다. 저녁을 먹기 위해 근처 국밥집에 갔다.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에게 국밥은 얼마나 은혜로운 음식인지. 호텔로 돌아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천천히 씻었다. 결국 가져간 책(‘작별들 순간들’)은 읽지 못했다. 객실의 스탠드 불빛은 오로지 잠을 위해 존재하는 듯, 책을 읽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이것은 핑계인가? 어쩌면 나는 스스로 그 책의 마지막을 유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작별의 순간을? ‘작별은 바로 지금,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궁극의 사건이었다.’라고 작가는 썼다. 그래, 심지어 내가 그것을..

토성의고리 2023.03.22

어떤 순간들

아무런 계획이 없이 춘천을 가게 되었다. 그곳은 내 고모가 사는 곳이자 고모의 딸, 그러니까 내 사촌동생의 집이기도 했다. 나는 사촌동생과 함께 사촌동생의 남자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춘천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사촌동생의 남자친구는 나를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하며 환하게 웃었는데, 인상이 순해 보였다. 밤이었고, 우리들은 집 근처 작은 술집에 가서 육회 한 접시와 제육을 곁들인 구운 두부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술을 마신 나는 점차 말이 많아졌다. 어느 순간 나 혼자만 떠들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우리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뭐 하지? 집에 도착하자 고모가 나를 보며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글쎄, 하고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춘천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어느푸른저녁 2023.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