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용감한 이들을 위하여

호랑이가 나오긴 하지만, 호랑이에 대한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호랑이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작가는 한때 우리나라에 번성했던 -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말살되었던 - 호랑이의 진정한 현현은 그 시절 억압에 맞섰던 이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호랑이의 꺾이지 않는 야수성, 독립성, 저항성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저변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까. 이 소설은 '옥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까지 수십 년에 이르는 시간 속에서 얽히고설킨 인간 군상들을 설득력 있게 그려 낸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던, 암울했던 시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자신도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흔해빠진독서 2025.12.25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뭐랄까, 일단 이게 '첫' 소설집이라는 것이다. 좀 이상한 문장이긴 하지만, 첫 소설집이라는 걸 강하게 느꼈다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겠다. 그럼 첫 소설집이라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내가 느낀, 깊은 인상을 받은 첫 소설집이라는 것은, 그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 그야말로 그것이 '김기태'라면, 김기태라는 작가의 탄생(!)이라는 수식어를 붙일만한, 뭐 그런 느낌의 소설이랄까. 개성이라는 것은 작가에 따라 현재의 트렌드를 잘 녹여낸 것일 수도 있고, 어디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는 독특한 문체를 구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소설이라는 매체가 지닌 상상력을 잘 드러낸 것일 수도 있으며, 소재나 그것을 다루는 시선이 다소 파격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

흔해빠진독서 2025.06.15

개 이전에 짖음

이 산책로는 와본 적이 없는데 이상해.다정한 편백나무들 그림자들 박쥐들가지 않은 길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어요?만나지 않은 사람과 헤어진 적은? 어제는 죽은 사람과 함께 걸어갔는데마치 죽지 않은 사람처럼 그이가 내 팔짱을 끼었는데내 팔이스스르 녹아갔는데 기억하나요? 여기서 우리는 보자기를 바닥에 깔고 앉아 점심 식사를 했었잖아요. 보자기라니 정말 우스워.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죠. 오래전에 죽은 강아지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는데 대낮이고 사방이 캄캄하고 처음 보는 길이었지. 길을 잃기에 좋은 길이었다. 이미 죽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왈왈, 짖고 싶은 기분이었다가 아마도 나는 당신의 미래의 오후의 꿈속에조용한 기억에 담긴잼 같은 것인가 봐요끈적끈적 흘러내리나요.달콤한가요. 강아지 한 마리가 왈왈..

질투는나의힘 2025.03.30

고요한 읽기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고,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생각은 어떤 문장의 작용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니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끌려 나와 모습을 보이기까지 그 생각이 내 안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테니까요.(이승우, 《고요한 읽기》 중에서)  *내 독서 방법은 이것이다. 우선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문장들이 적힌 페이지를 메모해 둔다. 책을 다 읽으면 메모해 둔 페이지의 문장들을 블로그에 옮긴다. 블로그에 옮기면서 다시 한번 더 그 문장을 읽는다. 그렇게 두 번 정도 읽고(엄밀히 말해 두 번 읽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책을 덮는다. 그렇게 읽은 책을 내 책상 왼 편 - 눈에 잘 띄..

흔해빠진독서 2025.03.08

바우키스의 말

"이승과 그리 멀지 않은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 봐 겁났던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가 뒤에 오는지 봤다. 아내는 팔을 뻗어 남편을 안으려 했지만 그 안타까운 손은 허공만 잡을 뿐. 다시 죽은 그녀는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사랑이 무슨 죄겠는가? 그녀는 그에게 닿을 수 없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다시 저승으로 내려갔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중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본 후 나는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떠올렸다. 아니다.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읽고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최근에 본 그 영화가 떠올랐다는 게 맞는 말이다.(물론 선후 관계가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게 있다면 영화가 소설을, 소설이 영화를 생각나게..

흔해빠진독서 2025.01.25

위키드

뮤지컬로 보지 못한 '위키드'를 영화로 보았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보았는데, 뮤지컬 특유의 흥겨움과 멋진 넘버들은 예상했던 바이지만, 인간의 여러 가지 면모를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글린다도 그렇고 피예로나 보크도. 다소 얄팍할지라도, 오히려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특히 파티 장면에서 단체로 춤을 추며 외치던, 먼지 같은 삶이니 노래나 부르고 춤이나 추자는(뭐 대충 그런 말이었던 것 같다) 말이 기억에 남는다. 뮤지컬이라면 응당 그런 요소들을 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때도 없지 않은가!  결국 엘파바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마법사로 성장하게 되지만,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마법은, 너무나도 다른 저 두 사람이..

봄날은간다 2024.11.23

룸 넥스트 도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룸 넥스트 도어》를 보았다. 내가 사는 곳의 메가박스에서는 오늘 고작 1개 상영관에서 단 두 번 상영을 했다. 놓쳤으면 아마 한참 뒤에 봤거나, 보지 못하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영화관은 나를 포함해서 단 두 명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를 본다. 오래전에 그의 《그녀에게》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 《나쁜 교육》을 봤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어렸을 적 트라우마로 고통받던 남자가 자신을 고통에 빠트린 사람을 찾아가 복수를 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암튼 영화가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무척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다. 이번 영화는 감독의 첫 번째 영어 영화라고 하는데, 배우가 무려 틸다 스윈튼과 줄리앤 무..

봄날은간다 2024.10.27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1은 덜컹거리면서도 응축된 감정의 폭발이 매력적인 영화였다. 이번에 나온 조커 2편이라 할 수 있는 '폴리 아 되'에서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물론 1편에서 인상적으로 보여준 조커의 내면세계를 어떤 식으로 더 보여줄 수 있을까에 관심이 가긴 했다. 하지만 는 조커의 내면을 더 파고들지도 못했고, 조커를 둘러싼 사건의 양상을 좀 더 재미있게 만들지도 못했다(할리 퀸이라는 특급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조커와 아서 플렉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결국 이도저도 아닌 영화를 만들어내고 말았다(아서 플렉이 조커이고 조커가 아서 플렉이지만, 영화는 자꾸 이 둘을 갈라놓으려 한다.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은 그게 아닐까?). 뮤지컬이라는 형식과 그에 따라 선택된 노래들은 매우 ..

봄날은간다 2024.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