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822

한 달만 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 달을 좀 다르게 사는 것

'포르투 한 달 살기'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영상의 주인공은 퇴사 후 남편과 함께 일본에서도 한 달, 바르셀로나에서도 한 달, 포르투에서도 한 달, 이런 식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한 달 살기를 하는 중으로 보였다. 가장 최근 영상이 포르투에서 한 달 살기였는데, 나 역시 몇 년 전 포르투갈 리스본에 다녀온 기억이 있어서 꽤 흥미롭게 보았다. 물론 리스본과 포르투는 다른 도시이지만 같은 포르투갈이라는 점에서 어떤 동질감을 느낀 것 같다. 리스본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도시이고, 그래서 리스본이,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특별하게 다가왔듯이. 영상은 처음 포르투에 도착하여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는 여정부터 시작을 한다. 일단 숙소를 보여주고, 포르투의 거리 풍경과 건물들을 보여주..

어느푸른저녁 2025.06.09

잊히지 않는 혹은 잊을 수 없는

오래전 나는 어느 지면에선가 한강 작가의 글을 읽었고, 작가가 언급한 케테 콜비츠라는 낯선 이름의 예술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무엇엔가 이끌리듯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았고, 얼굴을 감싼 검고, 굵고, 투박한 - 쉬 잊히지 않는 - 손과 자화상을 보게 되었다. 이상하지, 잊히지 않는 혹은 잊을 수 없는 기억처럼 그의 작품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나곤 하는 걸 보면. 이것은 분명 우연이겠으나, 우연이란 결코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 내 가슴속 어딘가 그의 인상이 저 검은 판화처럼 새겨진 탓이리라. 정말 이상하지, 실제로 그 작품들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어떻게 그 이미지가 내게 들어와 새겨질 수 있나.

어느푸른저녁 2025.06.03

어쩌면 이곳은

출근길,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하는 것은 새들의 지저귐이다. 나는 건물에 들어가기 전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본다. 희한하게도 새들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선명하다. 그런데 그 소리가 무척 경쾌하여 잠이 다 달아날 정도다.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 무겁던 출근길이 한층 가벼워진다. 그러다 오늘 오후 잠시 머리를 식히러 건물 밖을 나왔다가 새들을 보았다. 새들은 여전히 경쾌한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자 거기 거짓말처럼 아주 작은 새들이 건물의 구석구석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곳은 원래 저 새들의 집이었는지도 몰라. 나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는 온통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나무들이 ..

어느푸른저녁 2025.05.27

어떤 습관

"내가 담배를 피우는 건 중독이라기보다는 그냥 습관인 것 같아요. 흔히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곤 하지만 말이죠." 그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나는 중독이 된다는 게 곧 습관이 된다는 말이 아닐까 싶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다 스트레스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가 흘러갔다. 나는 그에게 "담배는 그렇다 치고, 술도 못 마시는데 스트레스를 뭘로 풀어요?" 하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나는 탁구를 치잖아요." 하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탁구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크고 작은 대회도 참가하는 등 실력이 꽤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번엔 그가 내게 물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떻게 풀어요?" 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 역시 술도 잘 마시지 않고, 담배도 안..

어느푸른저녁 2025.05.14

산책의 목적

산책을 하러 나갈 때마다 짧은 고민에 빠진다. 책을 들고나갈 것인가 그냥 나갈 것인가. 책을 들고나간다면 내 산책은 분명 천천히 걷다가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이 되겠지. 책을 읽기 위한 산책이 되겠지. 하지만 책을 들고나가지 않는다면 내 산책은 걷는 것에 보다 집중하게 되겠지. 천천히 걸을지언정 조금이라도 더 걷게 되겠지. 걷기 위한 산책이 되겠지. 산책을 할 때마다 고민을 하지만 나는 결국 책을 집어든다. 일단 책을 들고나가서 마음이 내키면 책을 읽고, 그렇지 않으면 걸으리라 생각하면서. 어쩌면 나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책을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눈부신 햇살 아래를 걸으며, 그늘에 앉아 책을 읽고, 책을 읽은 시간만큼 더 걸으리라고. 실제..

어느푸른저녁 2025.05.04

인생이 소설 같다면

인생이 소설 같다면 어떨까? 소설 속 무수한 인물들처럼 내 삶도 그러하다면 나는 내 삶을 견딜 수 있을까. 보통의 삶은 소설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지극히 평범한 삶,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 그런 것 따위 아무 상관하지 않는 삶,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삶, 그런 삶은. 만약 두 가지 인생 중 골라야 한다면, 나는 내 인생이 소설 같기를 바라기보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나무 그늘 아래서 소설을 읽는 삶을 택하리라. 그런데, 우리 모두는 자신이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던가?

어느푸른저녁 2025.04.28

삭막한 삶

대도시로 이사를 간 동생과 이야기를 하다가, 동생 내외는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삶에 적응하고 있는 조카들의 삶도 녹록지 않겠구나 싶었다. 누구나 자신 앞에 놓인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살겠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니까. 나는 동생 집에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다 문득 삭막하다는 말이 생각났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시골에서 자란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살든, 무엇을 하든, 우리는 적응하느라 애쓸 것이고, 그러다 보면 삭막해질 것이며, 급기야는 피폐해지다가 언젠가 자기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묵묵히(잘못되었으면 잘못된 채로)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아직 어린 조카들은 자신의 바뀐 환경을 더 반길지도 모른다. 그들의 세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

어느푸른저녁 2025.04.23

밀린 독서

밀린 독서를 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밀린 독서란 무엇일까? 밀린 빨래처럼, 독서도 밀려있는 것일까? 밀려 있다는 건, 언제까지 그것을 해야만 하는데 하지 못해 쌓여 있다는 말일 텐데, 그럼 나는 책을 언제까지 읽어야 한다는 말인가? 어떤 이유 때문에 책을 일정 기한 내 읽어야 한다면, 그래서 읽지 못한 책이 산적해 있다면, 그것은 밀린 독서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 그 책을 읽어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저 느긋하게 책을 읽다가 성미에 맞지 않으면 다른 책을 읽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하지만 또 내 방 책장에 꽂혀 있는, 읽지 않은 책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금 내 독서는 밀려있다고도(그것도 아주 많이!)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또 내 방에 존재하는 읽지 않은 책들이 아니..

어느푸른저녁 2025.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