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995

모르는 사람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다. 초등학교 동창 누구라고 했다. 이름이 익숙하긴 한데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동창회 모임을 하는데 나오라는 이야기였다. 밴드로 붙여 놓은 것처럼 초등학교 때의 기억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니. 다 모르는 사람들일 뿐인데. 나는 그와의 대화가 점차 두려워졌다. 다른 동창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설마 그럴 리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아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과거 속의 나와 굳이 대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20240421)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니. 다 모르는 사람들일 뿐인데.  오늘도 동창회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며..

어느푸른저녁 2025.03.22

탕진하는 삶

문득 읽지 않은 책들로 둘러싸인 방에 홀로 앉아서, 핸드폰이나 유튜브를 몇 시간씩 보고 있으니 갑자기 탕진(蕩盡)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탕진의 사전적 의미는 '모두 써서 없애다'라는 뜻인데, 써서 없애는 것에는 재물 따위뿐만 아니라 시간, 힘, 정열 등을 '헛되이' 쓰는 것도 해당된다고 인터넷 국어사전에 나와 있었다. 나는 재물이나 시간, 힘, 정열이라는 단어보다도 '헛되이'라는 말에 눈길이 갔다. 그 말이 나를 건드렸다. 나는 지금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읽지 못한 책은 끝내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일까.   나는 언젠가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지금의 나는,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다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 말을 고쳐서, 지금의 나는 내가 ..

어느푸른저녁 2025.02.19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중에서  *통증으로 인한 고립은, 통증과 내가 온전히 마주하게 되는 시간 속에서, 그러니까 집에서 쉬고자 하는 순간에 더욱 촉발된다. 아픔을 낫게 하기 위해 쉬는 순간, 아픔은 더 활개를 치며 다가오는 것이다. 그 순간은 나와 고통이 오롯이 마주하게 되는, 말하자면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상하다. 머리가 아프니 잠이 온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시 머리가 아프고, 그러면 다시 잠을 자고. 어제는 하루종일 그랬다. 그렇듯 맥없이 몸이 무겁고 쳐지는 경험은 ..

어느푸른저녁 2025.02.16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것 아닙니까?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것 아닙니까?" 강연에서 누군가가 인간관계에 상처받지 않는 법이 있느냐는 물음에 슬라보예 지젝이 한 말로 보인다. 영상으로 본 것은 아니고 한 장의 사진으로 보았다. 마치 인용하듯 잘라낸 한 장의 사진으로. 그 한 장의 사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법이 있는가에서부터, 완전히 고립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이며 그것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가... 완전한 고립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은둔수사처럼 속세와의 인연을 끊지 않는 이상. 만약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번뇌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관계와 그로 인해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상처. 고독이..

어느푸른저녁 2025.02.01

오직 바람이 말하게 하라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바람이 말하게 하라. 에즈라 파운드는 《칸토스》에서 그렇게 썼다'라고 배수아는 《바우키스의 말》에 썼다. 나는 그 말을 다시 쓴다. 내가 무언가를 읽고 쓴 모든 것들은 그것을 쓴 자의 말을 다시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그가 쓴 말로 말한다. 그가 쓴 말로 내 말을 대신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느낀다. 그것에 희열을 느낀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의 말에 담긴 아름다움을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한 채 쓰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가 말하게 하라' 여기서 '그'는 내가 읽은 배수아 혹은 페소아다. 혹은 수많은 다른 이름들이다. 아, 오해하면 안 된다. 내가 말한 아름다움은 그저 통상적인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포..

어느푸른저녁 2025.01.27

뜨겁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겨울숲은 서걱서걱 소리가 난다. 물기 없는 마른 가지들과 종잇장처럼 마른 이파리들이 서로 부대끼며 내는 소리. 하루종일 모니터만 노려보다가 오후에 잠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숲의 소리를 듣는다. 감았던 눈을 뜨고 저 멀리 산을 바라본다. 나는 지금 겨울의 한가운데 서 있구나. 그렇게 서서 겨울을 바라보고 있구나. 그래, 나는 살아 있구나. 뜨겁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어느푸른저녁 2025.01.15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잊고 살았구나

핸드폰을 보다가 문득 오래전에 받은 문자나 카톡을 정리할 때가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당시에는 필요에 의해서 주고받았을,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이제 그만 빠져나오고 싶어서랄까. 그런데 이상하지, 지난 문자들을 볼수록 쓸쓸해지는 건.  나는 지금껏 너무 많은 것들을 쉽게 잊고 살았구나, 쉽게 놓치고 살았구나 싶어서. 누군가의 결혼과 부고 소식들, 오래 만났던 모임의 파기를 알리는 소식들, 안부를 묻는 소식들을 너무 모른 채로 지나쳐왔구나 싶어서.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이 쓸쓸함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게 남겨진 고립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리라.

어느푸른저녁 2025.01.15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며칠 전 백골단을 자처하는 자들이 어느 국회의원의 주도로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했다는 뉴스를 보고 이건 정말 아닌데 싶어 화가 났다. 며칠 뒤 아버지를 만나 그때 보았던 뉴스 이야기를 하는데 그만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아니, 내가 생각했던 '이건 아닌데'가 바로 아버지였다니! 나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닌데,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닌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내 아버지인데, 아닌 건 아니라고 말씀하시겠지 싶었는데, 정말이지,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아버지를 상대로 이게 뭔가 싶어 흥분을 가라앉히고 갑자기 소리를 질러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래, 화가 나면 지는 거라고 했다. 아버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나는 나를 다스릴 필요가 있다...

어느푸른저녁 2025.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