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81

미래의 불가능한 망명을 막연히 그리워하는

여름이 도래하면 나는 슬퍼진다. 원래는 한여름의 작렬하는 태양이 환하게 비치면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위안을 얻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상태로 생각하고 느끼는 내 감각의 영원히 묻히지 못한 시신들과, 외부에서 거품처럼 부글거리며 넘쳐나는 삶들 간의 대비가 너무도 날카롭다. 이것은 우주라고 알려진 국경 없는 조국에서, 비록 내가 직접 탄압을 받는 건 아니지만 영혼의 비밀스러운 신념이 모욕당하는 그런 폭정 아래 살아가는 느낌이다. 그리하여 나는 서서히, 미래의 불가능한 망명을 막연히 그리워하게 된다.(769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 페소아가 슬퍼한 여름이 이제 가려한다. '영혼의 비밀스러운 신념이 모욕당하는 그런 폭정 ..

불안의서(書) 2023.09.10

그것은 일종의 삶의 확장이었다고

"자신의 인생의 책을 단 한 권만 고르라는 것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인데요. 지금 저에게 떠오르는 책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가 아닐까 합니다. 그 책은 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거든요. 그 책을 통해서 저는 굉장히 많은 새로운 감정을 배웠어요. 제가 직접적인 인생에서는 그렇게 깊이 체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것은 일종의 삶의 확장이었다고 생각해요." - 배수아, '2018 서울국제도서전' 인터뷰 중에서

불안의서(書) 2023.02.12

세상 최초의 아침

지금 밝아오는 이 아침은 이 세상 최초의 아침이다. 따스한 흰빛 속으로 창백하게 스며드는 이 분홍빛은, 지금껏 단 한번도 서쪽의 집들을 향해서 비춘 적이 없었다. 집들의 유리창은 무수한 눈동자가 되어, 점점 떠오르는 햇빛과 함께 퍼져가는 침묵을 지켜본다. 이런 시간은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다. 이런 빛도 없었으며, 지금 이러한 내 존재도 아직 한번도 없었다. 내일 있게 될 것은 오늘과 다를 것이며, 오늘과 다른 새로운 시선으로 채워진 눈동자가 내일 내가 보는 것을 자신 속에 담아낼 것이다.(185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를 읽다보면 때로 그 의외성에 놀랄 때가 있다. 그의 불안, 체념, 상실, 고통, 모순, 불가해한 모든 것들이 결코 절망에만 닿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불안의서(書) 2022.06.20

나는 고통 자체보다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그 의식을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내 느낌의 강도는 내가 느끼고 있다는 의식의 강도보다 항상 더 약했다. 나는 고통 자체보다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그 의식을 더욱 고통스러워했다."(184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문득 페소아의 를 펼친다. 그렇게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를 읽는다. 읽자마자 저 문장을 발견한다. 나는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으나 오늘 처음으로 읽는 것 같다. 는 참으로 이상한 책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매번 다른 문장들이 말을 건넨다. 나는 그렇게 매번 다른 문장들에 사로잡힌다. 페소아라는 '마력'에 사로잡힌다. 결코 과거가 될 수 없는 페소아라는 이름에. "나는 내 것이 아닌 인상으로 살아간다. 나는 체념을 남용하는 자이고,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매번 다른 이가 된다."(184쪽) 그렇..

불안의서(書) 2022.06.18

착각하는 삶, 착각 속의 삶

'우리가 진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가장 소름 끼치는 진실이다.'라고 페르난두 페소아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은 어떤가. '우리는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가장 소름 끼치는 진실이 아닐까?' 꿈 혹은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깨어나려 하지 않는 것. 혹은 그것을 외면하는 것. 착각하는 삶. 그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쩌면 인생이란 거대한 착각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네 삶이 거대한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그곳에 머무는 것은 아닌가. 깨어나는 것은 거대한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고, 두려움을 직시하는 일이기에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착각 속에 빠져 사는 삶은 편하고, 달콤하다. 하지만 거기서 깨어나 진실을 바라보게 된..

불안의서(書) 2022.05.23

페소아

페르난두 페소아. 한 번이라도 그의 글을 읽었던 사람은 그 이름을 잊지 못한다. - 배수아 역, 『불안의 서』, '옮긴이의 글'에서 * 몇 년 전 페소아의 를 읽고부터 그는 늘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결코 설명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생의 비밀을 마주할 때면 늘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페소아였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페소아 연구자라 일컫는 김한민이라는 작가가 쓴 를 읽게 되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은 무엇인가? 이 책은 페소아의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는 페소아라는 말이 포르투갈어로 사람을 뜻한다는 것, 그 어원이 가면을 의미하는 페르소나라는 것, 또한 페소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면 페르손느가 되고 이는 '아무도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처음..

불안의서(書) 2021.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