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239

민주주의를 시작하다

한 때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제목의 물음은 책의 유행을 지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처럼 보인다. 아니, 그것은 시대를 떠나 늘 물어야 하는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이 유행할 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 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 뉴스를 틀면 정치인 혹은 언론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앞다투어 정의를 내뱉었고, 그것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정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들었던 정의에 대한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정의'라는 말이 오염되었다는 것이었다. 오염된 정의라니! 우리는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도..

흔해빠진독서 2025.03.24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이다

이 문장이, 이승우의 소설 《그곳이 어디든》의 맨 앞장에 나와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의 기쁨보다, 어디선가 보거나 읽은 것, 한 번쯤 들어본 것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더 큰 반응(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건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이기 때문일까. 내가 이승우의 《그곳이 어디든》을 갑자기 들춰보게 된 건, 같은 작가의 산문집 《고요한 읽기》 때문이었다. 그 책에 《그곳이 어디든》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이승우가 쓴 산문집을 읽고 그가 쓴 다른 책들이 뭐가 있는지 보고 싶어졌다. 물론 내가 가지고 있고, 읽은 책들 말이다.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 하지만 언젠가 읽었던 것이 분명한 - 그의 소설들을 보면서 그의 책에 대해서 생각한다..

흔해빠진독서 2025.03.09

고요한 읽기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고,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생각은 어떤 문장의 작용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니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끌려 나와 모습을 보이기까지 그 생각이 내 안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테니까요.(이승우, 《고요한 읽기》 중에서)  *내 독서 방법은 이것이다. 우선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문장들이 적힌 페이지를 메모해 둔다. 책을 다 읽으면 메모해 둔 페이지의 문장들을 블로그에 옮긴다. 블로그에 옮기면서 다시 한번 더 그 문장을 읽는다. 그렇게 두 번 정도 읽고(엄밀히 말해 두 번 읽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책을 덮는다. 그렇게 읽은 책을 내 책상 왼 편 - 눈에 잘 띄..

흔해빠진독서 2025.03.08

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2013년 2월 1일에는 비가 왔나 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조용미의 시집을 읽고 있었던 것 같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니, 그날은 비가 왔고 나는 조용미의 《기억의 행성》을 읽었다. 당시 내가 쓴 글을 2025년 2월의 내가 다시금 읽고 있으므로. 시인은 〈기억의 행성〉이라는 시에서 '지구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기억'이라고 썼다.   나는 기억의 행성인 지구에 속해있지만, 내 기억은 늘 불완전하다. '지구 전체의 기억은 많지만 우리가 쓸 수 있는 기억은 극히 적'고 '기억의 행성 지구는 사실 기억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지구는 결국 변형된 기억으로 남게 된다고. '신성한 지구만 우주의 기억 속에 남게' 될까?   사라진 기억에 대해서 생각한다. '기억'은 사라지고, 사라졌다는 사실만..

흔해빠진독서 2025.02.06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설 연휴 전, 삼 일간의 휴일 동안 나는 혼자, 집에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이 책을 읽었다. 삼 일간의 공식적인 설연휴가 시작되기 전 내게 주어진 달콤한 휴일이었지만(설이 끝난 뒤 더 쉬었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그 기간 동안 나는 내가 책 한 권을 다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어떤 이는 하루에 한 권 혹은 몇 시간 만에 한 권은 우습게 읽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삼일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다는 것은, 내 독서 경험에 비추어 하나의 커다란 사건(혹은 성취)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읽은 황정은의 소설이었다. 오래전에 읽은 단편집들과 《百의 그림자》, 《계속해보겠습니다》 같은 장편 소설을 읽고 느꼈던 황정은 스타일에서 풍기는 느낌과는 사뭇 다른 듯했지만, 그럼에도..

흔해빠진독서 2025.02.02

바우키스의 말

"이승과 그리 멀지 않은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 봐 겁났던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가 뒤에 오는지 봤다. 아내는 팔을 뻗어 남편을 안으려 했지만 그 안타까운 손은 허공만 잡을 뿐. 다시 죽은 그녀는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사랑이 무슨 죄겠는가? 그녀는 그에게 닿을 수 없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다시 저승으로 내려갔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중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본 후 나는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떠올렸다. 아니다.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읽고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최근에 본 그 영화가 떠올랐다는 게 맞는 말이다.(물론 선후 관계가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게 있다면 영화가 소설을, 소설이 영화를 생각나게..

흔해빠진독서 2025.01.25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서 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라며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 김을 담은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 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 김민정,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중에서 김민정 시인의 이 시집을 언제 샀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내가 이 시집을 경주의 황리단길에 있는 작은 책방에서 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인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느 시기에 나는 이 시집을 샀고, 핑크색의 이 시집은 내 책상 위에 몇 년인지도 모를 시간 동안 내내 놓여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나면 시 한 편씩 혹은 기분 내키면 몇 편씩을 읽고는 다시 덮어두기를 반복했다. 오랜 ..

흔해빠진독서 2025.01.05

바서부르그의 열흘

2007년(무려!) 가을호인 《작가세계》는 배수아 특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이라는 배수아의 산문이 실려 있는데, 작가가 독일의 바서부르그에 머물면서 마르틴 발저를 만나러 간 일화가 나온다. 그는 발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태도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서둘지 않았고, 상대편에게 말이나 해명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도 해명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유머가 있는가 하면 너그러운 면모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는다.   '세월이 흐르면 그 기억들이 자연스레 희미해지겠지만, 그때 나는 너무나 슬플 것이다'  나는 《작별들 순간들》에서도 그랬지만, 그가 말하는 숲과 정원이, 그가 말하는 바서부르그가, 베를린이, 나아가 독일이라는 나라가 특별하..

흔해빠진독서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