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245

책을 덮자 아주 잠시 세계가 출렁거렸다

흔히 뜬구름 잡는다는 말을 쓴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허황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김선오의 《시차 노트》를 읽고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은 뜬구름 같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그의 글이 허황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이 책의 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두 개의 단어 사이를 오가거나 두 개의 단어를 발판 삼아 멀리 가는 글쓰기. 두 단어 사이의 영향 관계를 가늠하거나 생성하기' 나는 저 문장들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 사이를 걷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허황된 일인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쓰는 단어들의 세계를 새롭게 상상하고 탐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낯선 시공간 속으로 데려다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선을..

흔해빠진독서 2025.07.06

울음을 그친 것은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고, 비로소 운 것은 네 슬픔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허튼 약속 없이, 섣부른 이해 없이 아내를 슬픔에서 천천히 건너오게 하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오기는 미래의 슬픔을 이미 겪은 듯한 아내를 가만히 안아주었고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다가 그쳐가는 걸 지켜봤다.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편혜영, 《홀》 중에서)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때로 어떤 문장들은 그에 따른 생각들을 수없이 파생시킨다고. 그것을 공명한다고 하는 걸까? 그러니까 어떤..

흔해빠진독서 2025.06.21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뭐랄까, 일단 이게 '첫' 소설집이라는 것이다. 좀 이상한 문장이긴 하지만, 첫 소설집이라는 걸 강하게 느꼈다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겠다. 그럼 첫 소설집이라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내가 느낀, 깊은 인상을 받은 첫 소설집이라는 것은, 그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 그야말로 그것이 '김기태'라면, 김기태라는 작가의 탄생(!)이라는 수식어를 붙일만한, 뭐 그런 느낌의 소설이랄까. 개성이라는 것은 작가에 따라 현재의 트렌드를 잘 녹여낸 것일 수도 있고, 어디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는 독특한 문체를 구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소설이라는 매체가 지닌 상상력을 잘 드러낸 것일 수도 있으며, 소재나 그것을 다루는 시선이 다소 파격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

흔해빠진독서 2025.06.15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하버드대 교수이자 정치학자라고 하는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지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읽었다. 이 책은 2017년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에서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직감하고 쓴 책으로 보인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 신호는 그 이전부터 있어 왔겠지만(저자들은 민주주의가 붕괴된 여러 나라들의 사례를 들며, 그런 위험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제시한다),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더욱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자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가 이 책을 쓰게 된 큰 동기였을 것이다. 얼핏 미국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게 지엽적이지는 않다. 미국을 포함하여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을 예로 들어가며 민주주의의 보편적인 위기 상황에 대해서 이..

흔해빠진독서 2025.05.20

이제 나는 햇빛에 대해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 한강의 《빛과 실》을 읽고 있다. 내 방에서도 읽고 산책을 하면서도 읽는다. 책의 두께가 얇아 아쉽지만 들고 다니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책에는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이 실려 있고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하고 난 후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최초 제목이 '새가 돌아온 밤'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득 《소년이 온다》 첫 번째 장의 제목이 '어린 새'였다는 걸 떠올린다. 책에는 작가가 여덟 살에 쓴 시도 실려 있다.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여덟 살의 작가가 쓴 시처럼, 모든 게 금실처럼 연결되어 있는지도.(20250504) *책에 실린 '정원 일기'를 읽는다. 그가 북향 정원에 심었다는 식물이 미스김라일락, 불두화, 옥..

흔해빠진독서 2025.05.08

나는 나를 견딜 수 있는가

이 책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 사실은 애써 피한, 한 사건이 동기가 되어 만들어졌다. 1951년 9월, 내 아내 조앤을 총으로 쏘아 죽게 만든 사고다.(20쪽, 윌리엄 버로스, 《퀴어》)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자신의 아내를 총으로 쏘아 죽게 만들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그리고 이 책이 바로 그 사고로 인해 쓰였다는 사실 또한 고백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윌리엄 버로스라는 작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검색해 보았다. 실제로도 작가는 자신의 부인을 총으로 쏘아 죽게 만들었으며,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었고, 동성애자였다.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날 것 그대로 소설로써 형상화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윌리엄 리(작가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는 마약 소지 혐의로 미국에서의..

흔해빠진독서 2025.05.03

민주주의를 시작하다

한 때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제목의 물음은 책의 유행을 지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처럼 보인다. 아니, 그것은 시대를 떠나 늘 물어야 하는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이 유행할 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 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 뉴스를 틀면 정치인 혹은 언론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앞다투어 정의를 내뱉었고, 그것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정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들었던 정의에 대한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정의'라는 말이 오염되었다는 것이었다. 오염된 정의라니! 우리는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도..

흔해빠진독서 2025.03.24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이다

이 문장이, 이승우의 소설 《그곳이 어디든》의 맨 앞장에 나와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의 기쁨보다, 어디선가 보거나 읽은 것, 한 번쯤 들어본 것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더 큰 반응(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건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이기 때문일까. 내가 이승우의 《그곳이 어디든》을 갑자기 들춰보게 된 건, 같은 작가의 산문집 《고요한 읽기》 때문이었다. 그 책에 《그곳이 어디든》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이승우가 쓴 산문집을 읽고 그가 쓴 다른 책들이 뭐가 있는지 보고 싶어졌다. 물론 내가 가지고 있고, 읽은 책들 말이다.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 하지만 언젠가 읽었던 것이 분명한 - 그의 소설들을 보면서 그의 책에 대해서 생각한다..

흔해빠진독서 2025.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