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78

개 이전에 짖음

이 산책로는 와본 적이 없는데 이상해.다정한 편백나무들 그림자들 박쥐들가지 않은 길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어요?만나지 않은 사람과 헤어진 적은? 어제는 죽은 사람과 함께 걸어갔는데마치 죽지 않은 사람처럼 그이가 내 팔짱을 끼었는데내 팔이스스르 녹아갔는데 기억하나요? 여기서 우리는 보자기를 바닥에 깔고 앉아 점심 식사를 했었잖아요. 보자기라니 정말 우스워.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죠. 오래전에 죽은 강아지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는데 대낮이고 사방이 캄캄하고 처음 보는 길이었지. 길을 잃기에 좋은 길이었다. 이미 죽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왈왈, 짖고 싶은 기분이었다가 아마도 나는 당신의 미래의 오후의 꿈속에조용한 기억에 담긴잼 같은 것인가 봐요끈적끈적 흘러내리나요.달콤한가요. 강아지 한 마리가 왈왈..

질투는나의힘 2025.03.30

단단

남쪽 숲에선 새끼 곰이 깨어났습니다. 자는 동안에도 키는 자랐습니다. 가슴의 흰 반달도 커졌습니다. 곰, 발톱도 길었습니다. 두껍고 새카맣습니다. 자던 자리가 동그랗습니다. 엄마 곰은 어디 가고 없습니다. 빠진 이빨들 흩어져 있습니다. 곰, 외로움 있습니까? 곰, 일어나 앉습니다. 엄마와 약속한 일이 기억납니다. 산골의 다람쥐, 멧돼지, 토끼, 뱀들도 엄마랑 약속합니다. 긴 겨울이 지나면 깨어나기로 합니다. 따뜻해지면 맛있는 것을 먹기로 합니다. 꽃이 피면 같이 놀기로 합니다. 곰, 눈 비비고 기지개도 켜봅니다. 혼자 가만히 엄마 엄마 불러도 봅니다. 곰, 두려움 알고 있습니까? 몸이 가렵습니다. 앞으로 구르고 뒤로도 굴러봅니다. 곰, 배가 고프고 목도 마릅니다. 구멍 밖에서 쑥냄새, 취냄새 향긋하게 불..

질투는나의힘 2024.11.02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다

얼음장 밑을 흘러왔다고 했다. 힘들었던 건 내가 아니라 겨울이었다고 했다. 우리가 '첫사랑은······' 어쩌구 하는 70년대식 방화(邦畵) 속에서 눈덩이를 던지며 사랑을 좇던 늦은 오후에 어느새 너는 서걱이는 마른 대숲을 지나 내 곁에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무릎이 아프다고. 이젠 정말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녹슨 편지함 속에서 울었다. 그런 밤마다 나는 어머니가 아닌 너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따뜻했던 몇 가지 기억들을 다시 돌아온 너에게, 말 없는 눈발로 내 옆에 서 있었던 쓸쓸함을 묻지 않으리라. 어느 날 막막한 강변로에서 다시 너를 잃어버리고 창문 틈에 너는 기다린다는 연서를 꽂아놓을 때까지, 네가 내 옆에 없음을 알고 경악할 때까지 낡은 자명종의 태엽을 감으며, 너는 사라질..

질투는나의힘 2023.08.05

올랜도

오래된 비밀 하나 말해줄까, 나는 사포였다 다시 태어나는 조건으로 나의 뮤즈, 내 자매들을 신에게 헌납했다 그러나 욕망은 악착같은 것 모든 재능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다 쓰지 않는 손이 줄 끊어지는 순간의 악기처럼 떨린다 나는 잿빛 고수머리, 칼날을 쥔 유디트였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모든 용기의 목을 잘라 삶에게 가져갔다 그래도 희망은 여인 곁에 누워 있다 이 빠진 노파의 쭈그러든 젖을 빨며 울다 잠든 아기처럼 나는 햄릿이 사랑한 요릭 다시 태어나려고 익살을 전부 팔았다 질문은 핵심을 비껴간다, 안와에서 빠져나간 눈알처럼 껍질을 부수지 않고 노른자를 맛보려는 왕들은 어찌 가르쳐야 하나요 죽음의 간을 맞추려고 마지막 풍자까지 써버렸는데 나는 해운사에 취직한 이스마엘 배를 탔다, 하늘은 붉고 시간은 흰 돛..

질투는나의힘 2022.11.13

취한 말들을 위한 여름

이방인, 나는 밤과 낮의 수평선에 이르러 있다. 백피증 걸린 저 땅끝, 질긴 바다. 이방인, 몇 잔의 술로 데운 열대야가 내 안에서 습하다. 이방인, 여름이라 이곳에선 알코올 냄새가 난다. 담배를 꼬나물고 권총을 허리에 차고. 백사장 앞 부채 파는 좌판은 날벌레들로 점박이가 된 형광등이 훤하다. 이방인, 오늘은 반드시 추워야 한다. 내일부턴 춥지 않을 것이다. 왜 몸의 바깥을 맴도는 온도들뿐인가. 왜 몸으로 들어오는 온도들은 없는가. 이방인, 나의 내부가 다른 내부에 닿아야 나는 흥분된다. 필시 몸이 몸으로 전염되는 거겠지. 성애도 성에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찰나는 극(劇)인가 극(極)인가. 이방인, 내부라는 모국을 떠나는 심정으로 너에게 말하고 있다. 파라솔이 더운 바람으로 축축하다. 그 밑으로 펼쳐..

질투는나의힘 2022.08.20

지울 수 없는 얼굴

냉정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 고정희, 전문

질투는나의힘 2022.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