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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문제는

이렇게 차분히 앉아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쓸 생각조차 없이 - 하지만 무언가라도 쓸 요량으로 - 하얀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다. 한때의 호기심으로 트위터에 짤막한 생각을 올리면서부터 블로그와는 좀 멀어진 듯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물론 트위터에서의 단상을 블로그에 옮기기도 하고, 거기서 비롯된 생각을 좀 더 길게 적어보기도 했지만 어쩐지 트위터를 하기 전에, 내가 블로그를 대하던 그 마음으로부터는 좀 멀어진 듯 느껴졌다. 아무렴 어떠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마음 같은 것이 있었다(그런 이건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트위터를 하기 전에도 블로그에 글을 그리 자주 올리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내 마음속에 내 삶을 조금이라도 길게 적어보고 싶은 욕망이 있기 ..

어느푸른저녁 2024.12.23

단상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는 트윗을 보았다. 아마 고등학생인 것 같은데, 그의 의문이 순수하면 할수록(설사 어떤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이 사회는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좋은' 대학이란 무엇이며,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딱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못이 언다고 오리들이 얼거나 굶어 죽는 것은 아니듯, 좋은 대학을 못 간다고 그 사람들의 인생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 자신의 인생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갈 뿐이니까. 세상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내가 보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것이 더 많으니까. 내가 아는 확실한 한 가지는, 세상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2..

입속의검은잎 2024.12.15

네가 정치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제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약속 시간은 마침 탄핵안 표결을 하는 시간이었고, 나는 표결을 다 보고 나서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나는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탄핵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농담조로 말했다. "네가 정치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나처럼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도 저절로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세상이라니." 그러고는 불법적인 계엄령에 대해서, 포고문에 실린 그 무시무시한 말에 대해서, 탄핵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평소 정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거리에 나가 목청껏 소리치며 부당함을 외친 저 보통의 시민..

어느푸른저녁 2024.12.15

명동성당에서

나는 처음으로, 서울역에서부터 명동성당까지 걸어서 막 도착한 참이었다. 하지만 성당을 보기 전에 먼저 본 것은 구걸을 하고 있는 부랑자였다. 나는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린 그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몇 년 전 스페인의 세비아 대성당에서 본 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려한 대성당과 정반대로 아주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의 걸인. 그것은 내게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때의 그 느낌을 명동성당 앞에서도 느낀 것이다. 물론 명동성당은 화려하다기보다는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활기찬 도시의 모습과는 무척 대조적인 그 풍경이 어쩌면 서울이라는 도시를 온전히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풍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성당은 내 생각과는 달리, 주위에 높은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성당..

어느푸른저녁 2024.12.13

빛과 실(한강 - Nobel Prize lecture)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뿐일까? 책자의 뒤쪽 표지에는 1979라는 연도와 내 이름이, 내지에는 모두 여덟 편의 시들이 표지 제목과 같은 연필 필적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페이지의 하단마다에는 각기 ..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등), 은행나무, 2024.

내가 쐐기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쐐기풀 차가, 산책길에 한 아름씩 꺾어오는 불가리스 쑥이, 여름 내내 어디에나 지천인 황금빛 골드루테 다발이 이 오두막의 삶에서는 아주 두드러지는 사건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루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15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  우리는 어떤 돌연한 사건과 마주치고, 그것을 스쳐 지나가고, 그런 후 그에 대한 생각에 잠긴 채 살아가게 되겠죠.(23쪽,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  *  내가 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면, 그 말은 내 편지가 나를 영영 떠난다는 의미였다. 내게서 나온 말은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혹은 나는 기억을 상실한 말과 다름없게 되리라. 그리하여 수십 년이 흐른 후..

단상들

*이 세상에 엄연히 생을 부여받아 존재했던 어떤 종이 남김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인간의 과도한 사냥에 의해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멸종, 절멸을? 정말이지 끔찍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이 안 되는.(20241118)  * 지인이 불러서 식사 자리에 갔는데 모르는 사람이 함께 와 있을 때의 어색함이란. 그 모르는 사람이 실은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모드로 돌입해야 한다는 사실의 피곤함이란. 사실 내가 그의 말을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했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과 지루함이란.(20241119)  * 앗, 고기는 이제 그만! 어째 사람들과 만나기만 하면 고기를 먹게 되는 것인지. 내가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돼지고기를 하루에 ..

입속의검은잎 2024.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