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코맥 매카시, 《로드》, 문학동네, 2008.

시월의숲 2020. 5. 19. 16:26

네가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들은 거기 영원히 남는다는 걸 잊지 마. 한번 생각해보렴. 남자가 말했다.

어떤 건 잊어먹지 않나요?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17쪽)

 

 


 

 

전 같으면 들어가지 않았던 숲이 되어버린 집의 잔해를 손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지하실의 검은 물에 쓰레기와 녹이 스는 관과 함께 둥둥 떠 있는 시체 한 구. 남자는 천장의 일부가 타버려 하늘을 향해 뻥 뚫린 거실에 서 있었다. 물 때문에 뒤틀린 판자들이 마당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서가의 물 먹은 책들. 남자는 한 권을 꺼내 펼쳤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모든 것이 축축했다. 썩어가고 있었다. 서랍에서 초를 하나 발견했다. 불을 붙일 방법은 없었다. 남자는 초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절대적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그리고 쫓겨다니며 몸을 숨긴 여우들처럼 어딘가에서 떨고 있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目).(149쪽)

 

 


 

 

아이를 기쁘게 해주려고 자신이 잃어버린 세계를 구축할 때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년이 자신보다 이 점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꿈을 기억하려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남은 것은 꿈의 느낌뿐이었다. 어쩌면 그 생물들이 그에게 경고를 하러 온 것인지도 몰랐다. 무엇을 경고하러?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재가 된 것을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로 피워올릴 수는 없다는 것. 지금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들이 이 피난처를 찾아내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어서 이 모든 것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174~175쪽)

 

 


 

 

있지도 않았던 세계나 오지도 않을 세계의 꿈을 꿔서 네가 다시 행복해진다면 그건 네가 포기했다는 뜻이야. 이해하겠니? 하지만 넌 포기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215~216쪽)

 

 


 

 

네 속에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

꿈 같은 거요?

꿈 같은 거. 아니면 그냥 네가 생각하는 거.

꼭 그럴 필요는 없어.

아빠는 언제나 행복한 이야기만 해주시잖아요.

너한테는 행복한 이야기가 없니?

우리가 사는 거하고 비슷해요.

하지만 내 이야기는 안 그렇고.

네. 아빠 이야기는 안 그래요.

남자는 소년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사는 게 아주 안 좋니?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는 그래도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린 아직 여기 있잖아.(3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