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명인, 《내면 산책자의 시간》, 돌베개, 2012.

시월의숲 2020. 6. 7. 14:57

나에게는, 말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와 상호부조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런 관계의 얽힘을 기피하는 이중성이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불편하고 힘들면 손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런 식의 '신세짐'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보다는 나의 이러한 얄팍한 이중성 앞에 직면하는 일이 더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라는 '선한' 이념과, '신세'라는 말에서 풍기는 어딘가 '편법적인' 분위기 사이의 분열. 또 기꺼이 신세를 지는 뻔뻔함과, 얽히는 것을 기피하는 개인주의 사이의 분열. 이런 것들이 어정쩡하게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결국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하는 뭔가 몰의식적인 상태로 빠지는 것이 무엇보다 힘겨운 것이다. 자립도 연대도 아닌, 고독도 의존도 아닌, 그 둘을 애매하게 섞어서 결국은 일차원적인 자기 이해의 추구로 귀결 짓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에 이성은 눈을 감는 게 아닌가?(21~22쪽)

 

 


 

 

S형은 결국 못 만나게 되었다. 나는 오늘 파리에서 돌아오고 형은 런던 생활을 다 정리하고 내일 파리로 떠난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참 이렇게 어긋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게 또 사람 사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둘 다 무의식 중에 서로 만나는 일이 힘들었을 수도 있다. 한때 같은 생각을 하던 사람들일수록, 살아가면서 인생의 오차 범위가 점점 커지면 만나서 말 나누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한편으로는 변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로의 변화에 당황하면서 서로가 일종의 거울처럼 자기 모습을, 그것도 아픈 부분만을 비쳐 주게 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수처럼 남아 있는 정서적 친화감 때문에 더욱 그 어색함이랄까 낯섦이 증폭되게 된다. 쓸쓸한 일이다.(88쪽)

 

 


 

 

고용의 유연화도 진정한 산업구조 합리화를 위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투기자본들이 이른바 인수 합병하기 좋은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남용됨으로써 전세계적으로 고용 불안과 노동의 게토화가 이제는 상시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어떻게든 루저가 아닌 위너가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남을 짓밟고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이웃을 돌아보고 사회를 걱정하는 대신 나 혼자만 살면 된다는 윤리 아닌 윤리가 유일한 삶의 지표가 되어 버렸다.(134~135쪽)

 

 


 

 

나는 늘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해 왔다. 여름의 그 늘어진 풍경, 늘어진 삶, 길게 빼문 혀처럼 긴장을 잃은 정신 이런 것들이 싫은만큼 겨울의 그 혹독함 속에서 단단히 여문 것들, 긴장된 것들, 예리하고 날카로워진 정신을 더 좋아해 왔다. 여름은 디오니소스의 계절이고 겨울은 아폴론의 계절이라 생각해 왔다. 물론 언제나 아폴론적인 인간이기를 바랐던 나는 당연히 겨울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봄여름보다 늘 가을과 겨울 쪽이 내 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신화학적 맥락을 빌려 올 필요도 없이 봄과 여름은 생성과 생명의 계절이고 가을과 겨울은 소멸과 죽음의 계절이다. 약동하는, 가만히 두어도 꿈틀거리는 생명은 굳이 긴장할 필요도 없다. 그냥 생명 그 자체가 요구하는 대로 해도 늘 건강하고 힘차고 올바르다. 하지만 소멸하는, 죽음과 가까워진지는 생명은은 긴장하지 않으면 시느브로 꺼져 버리고 늘 뒤틀려 있기 쉽다. 그렇게 보면 감성과 도취는 본디 생명의 것이고, 이성과 각정은 오히려 죽음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146~148쪽)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남의 시간이 아니라 자기의 시간을 최고의 시간으로 받들고 그 속에서 최선의 행복한 삶을 구가하는 것, 지구상의 모든 시간의 위계구조를 파괴하는 것, 그게 지금부터 생각 있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154쪽)

 

 


 

 

다른 사람의 견해가, 단편적이고 충동적인 생각들이 아니라 자기 생 전체를 다 기울여 만들어 낸 필생의 사상적 결과물이고, 내가 그것을 반박할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을 그냥 관조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부대낀 만큼 나도 부대끼며 그 생각과 전면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행복한 비명이다.(204쪽)

 

 


 

 

이제부턴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값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지금 같이 있는 사람들이, 지금 이 햇빛이, 지금 이 하늘이, 어쩌면 지금 이 어둠과 비바람까지도, 이 아픔과 미움과 원망까지도 모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소중한 것들이 될 것이다. 지금 나를 오래도록 괴롭히고 있는 이 병도 언젠가는 그리운 것이 될지도 모른다. 하여 나는 지지금 이 순간을 사랑할 것이다.(247~248쪽)

 

 


 

 

그의 지식인(지성인)은 사적인 목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적인 목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표상(재현, 대변)하는 존재다. 표상하되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서 표상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위험과 불이익을 감내해야만 하는 존재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필요하다면 관습, 전통, 애국심, 어떠한 집단주의 등과도 등을 돌려야 하고 보편 가치 이외의 어떠한 것에도 충성을 서약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주류 세력에 편입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모든 친숙하고 안정된 것들과 이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는 본질적으로 추방된 자이자 망명자이고, 이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건, 사물, 사람을 가깝게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먼 곳에서 그 역사성 속에서 볼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에 나온 지식인을 요약한 말, 264~2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