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문학과 지성사, 2002.

시월의숲 2007. 11. 5. 12:38

그때 나는 그의 손을 보았다.

그의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가 뭉툭하게 동강나 있었다.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잘려져 있었을 뿐이다. 힘없이 허공을 향해 펼쳐져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 그에게 주먹질을 한들,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인생은 쓰레기였다고 단정을 내린들, 그는 맞대거리를 할 수도, 멱살을 거머잡고 뒹굴 수도 없었다. 철저하게 그는 무력했다. 더 이상 오른손을 감출 수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잘린 손가락을 능욕하도록 버려둔 채 그는 누워 있었다.(73쪽)

 

 

*

 

 

네가 날 뜨고 싶다고 했을 때, 마치 내 가죽을 벗겨내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지. 네가 만든 껍데기들…… 지루하고 야비하더군. 그런데도 내가 허락한 건 왜였을까? 아마도 난 증명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내 껍데기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는 걸.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껍데기라면, 그게 껍데기인들 무슨 상관이겠어?(302쪽)

 

 

*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쓸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303쪽)

 

 

-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