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당나귀들》중에서

시월의숲 2007. 9. 18. 23:29

나는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데, 적어도 그래야만 하는데, 내가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고백하자면, 단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난 지금 한 마리 당나귀야.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나는 내 존재에 대해서 계속해서 사유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거야. 내 생각은 거기서부터 나왔어. 그래, 네 말대로 그것은 몽상의 시작이야. 그러나 나는 삶이 몽상에서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분리될 수 있다는 네 생각에는 찬성할 수 없어.(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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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는 구체적 선율 이외의, 내재적 개성이라고 할 만한 독특한 울림이 있는데,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듣는 자가 자신을 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음악을 듣는다. 집중할 수도 있고 또 그 안에서 자신을 충분히 방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제 듣느냐에 따라 그 울림의 파장이 다른 방법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모든 음악은 심연의 뚜껑을 연다.' 권터 그라스의 개들의 세월에 나오는 문장이다.그렇게 보통 때는 평범하게 들리던 음악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진짜 소리를 선물할 때, 나는 그것을 '재발견' 했다고 말한다.(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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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내가 시작된 이후, 시간은 오직 결코 대답을 구할 수 없었던 질문의 연속이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모든 것은 왜 시작되었는가, 시간은 어디로 가는가, 죽은 투구게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왜 어느 날 사라지는가, 만일 우리 모두의 사라짐을 지배하는 무가 존재하는 거라면 우리의 사라짐 또한 어딘가에 존재해야만 하지 않는가. 사라짐이라는 존재, 그것은 존재하지 않음의 존재 무의 대치점으로서의 무, 바로 그림자의 그림자인가.(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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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적어도 한국에서 채식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우선 바늘처럼 철저하게 냉정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적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말이다. 만일 절대적 채식주의를 실천하고 싶다면 가능하다면 육식주의자들인 과거의 친구들과도 절교하는 편이 좋다. 아니, 사실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지나치게 들린다면, 당신은 한 번도 채식주의의 이념을 가져 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하여간 그래서 나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예를 들자면 내가 최초로 만난 절대적 채식주의자였던 그는 된장국을 끓이기 위해 조개를 냄비 속에 넣는 나에게 물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겁니까, 아니면 죽어 있는 겁니까?‘

 

'살아 있는 건데요.‘

 

'그렇다면 천천히 죽이는 셈이 되는군요.'(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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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어둠 속에서 더한 어둠이 보이지 않는 빛을 잡아먹으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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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잠은 어느덧 내 인생의 가장 비중 있는 부분이 되어 버렸으므로 나는 꿈을 잊지도 않았고,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오랫동안 그것에 관해서 생각하게 된 상태였다.(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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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 우리는 서로 사랑했으나 지금 그 가슴은 말라붙었지. 그러나 죽기 전 단 한 번만은 그 가슴이 지나간 노래를 다시 기억할지도 모르니. 숲을 지나온 바람이 한숨이 되고 높은 자작나무 잎새들이 바람의 언어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것을 자세히 듣기 위해서 귀를 자작나무의 가슴에 꼭 대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서서히 마음이 녹아 흐르듯이, 내 심장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일생 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이런 순간이 있었을까 싶도록 아름다웠다.(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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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모를 열정으로 입술이 자주 마른 젊은 날에도 변함없이 언제나 궁금하기만 했던 것은 삶의 마지막을 향해서 가는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었다. 마지막을 향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의미나 의지도 없는 삶의 단계. 오직 산을 오르기에만, 사막을 건너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듯이 나도 그들에게 경외를 바치리라. 그 시간이 다가오면 눈앞에서 진흙의 비가 내린다는 것을 그때는 아직 몰랐다. 그들은 어떤 비밀을 가슴에 지니고 지나가는가. 그들은 불행할까, 행복할까. 그들은 흐느껴 울까. 끝없이 이어지는 목쉰 중얼거림. 그들은 위안을 얻을까. 그들이 앞서 들은 것, 나도 마침내 그것을 듣게 될까. 나도 그 비밀을 가지게 될까. 나는 밤새 창가에서 귀를 기울이고, 응시하고, 기다린다. 단 한 번의, 마지막 순간에만 찾아오는, 세상에서 가장 염세적인 위안이여.(303~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