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은희경, 《비밀과 거짓말》, 문학동네, 2005.

시월의숲 2008. 4. 29. 23:41

인생이 자기 예상대로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누가 예상대로 된다고 그랬어? 거봐요. 그러니까 미리 나쁜 예상을 다 해놓아야 한다구요. 그런 예상대로는 안 될 테니까 나쁜 일도 없을 거 아녜요? 좋은 일이 올 거라고 기대하면 보통 정도의 일 갖고도 나쁘게 됐다고 비관적으로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치만 최악의 경우를 예상해놓으면 언제나 그보다는 나은 일이 닥치게 되죠.(99쪽)

 

 

*

 

 

현실에 반항하는 사람보다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실은 더 위험한 거잖아요, 더 비극적이고. 제가 그렇거든요. 인간은 시간이 되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유한한 존재고,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요. 선택은 두 가지뿐이죠. 혼자만의 곳으로 떠나버리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주변인으로 떠돌거나. 저는 떠나지 못하고 공허하게 떠도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해요.(106쪽)

 

 

*

 

 

네이폴의 소설 『흉내』에서 자기 고향에 가도 영원히 방문자일 수밖에 없는 '뿌리뽑힌 이방인' 싱은 독백한다. '우리는 진짜인 척하고, 배우는 척하고, 인생에 대한 준비를 하는 척했으나, 사실은 새로운 세계의 한 모퉁이에 사는 흉내내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다만 흉내로, 비극적 허위로 매워가는 사람들. 영준은 흉내라면 얼마든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흉내내온 대상이 과연 진짜였던가.(178~179)

 

 

*

 

 

진실이란 대개 추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밀이나 거짓말은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수단이다. 진실이라는 공의(公義)에 의해 쫓겨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도달하여 몸을 숨기는 막다른 골목의 어둠이라 할 수 있다.(192쪽)

 

 

*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끝에 이르면 거기에는 슬픔이 있는 것이다. 기쁨과 증오, 분노, 사랑, 모든 감정의 극단에 이르러 인간이 결국 슬퍼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슬픔이란 인간이 자기 존재의 유한함을 자각하는 짧은 순간을 뜻하는 건지도 모른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최후로 닿을 수 있는 감정의 경계에 부딪쳐 얻는 고통이 바로 슬픔이다. 경계 너머에는 아마 무한의 세계, 그러니까 허무가 존재할 것이다. 시작도 종말도 없으며 모든 것은 무의미하게 지속된다. 만약 누군가 슬픔의 경계에 도달해 허무를 엿보았다면 그는 인생에 대해 담담해질 수 있을 것이다.(198쪽)

 

 

*

 

 

성장이란 자신이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위치한 보잘것없는 좌표를 읽게 되면 그때 비로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년들은 일찍부터 자기라는 존재를 자각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만나기까지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소년이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한 가지 연료는 환멸이다.(225~226쪽)

 

 

*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지 그 자리를 벗어나거나 떠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인생에 의미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일까.(235쪽)

 

 

-은희경, <비밀과 거짓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