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진중권,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휴머니스트, 2008.

시월의숲 2008. 5. 8. 21:38

오늘날의 상상력은 기계공학, 정보공학, 유전공학이라는 테크놀로지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상상력은 미디어 이론가 빌렘 플루서의 말대로 '기술적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상상과 현실 사이에 놓여 있던 질료의 저항을 점점 더 무력화시키고 있다. 상상이 질료의 저항 없이 곧바로 현실로 전화하게 된 것이다. SF는 더 이상 문학의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아예 현실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상상력의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미래의 생산력은 상상력이 될 것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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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우연적인 예술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 우연히 발생한 여러 경우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은 어차피 예술가의 과제로 남기 때문이다. 첫눈에 폴록의 작품은 철저하게 우연의 산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그저 물감을 뿌리기만 했을까? 그 역시 뿌려진 물감의 형상을 보고, 다음은 어디에 물감을 뿌릴지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카오스(혼돈)+코스모스(조화)=카오스모스(chaosmos)라 할 수 있다. 고대의 신화적 카오스에서 근대의 신학적 코스모스로, 거기서 현대의 예술적 카오스모스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세계다. 혼돈 속에도 질서는 숨어 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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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자 아도르노는 '어리석음'을 현대 예술의 특징으로 들었다. "아이들이 광대에게서 느끼는 공감은 예술에서 느끼는 공감이기도 하다." "짐승/바보/광대라고 하는 짜임새는 예술의 기본 계층이다." 합리성의 눈으로 보면 예술은 어리석어 보인다. 예술은 왜 어리석어지는가? 합리성에 미쳐버린 현대 사회를 심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작품의 어리석음은 현실 세계의 합리성에 대한 심판이다." 합리성의 추구가 광기로 치닫는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현명해지려면 예술처럼 어리석어져야 한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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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세상을 거꾸로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인류의 업적 중 위대한 것들은 종종 물구나무서기의 산물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수천 년 묵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모델을 거꾸로 세워 지동설을 만들어냈다. 칸트는 철학에서 시간과 공간을 인간의 머릿속에 집어넣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했다. 카를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론 철학 뒤집어 '사적 유물론'을 만들어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철학자 니체도 세상을 뒤집어 이른바 '가치 전도'를 수행했다. 정신과 기술의 위대한 창조자들은 능숙한 물구나무 선수들이다. 그들은 역사가 답보한다고 느껴지는 시기에, 상투적 시각, 고정된 관념을 물구나무세워 정신의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구를 찾아내곤 했다.(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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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을 하면 건물이 우리가 보는 세계에서 사라졌다가, 포장을 풀면 다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이것처럼 당연한 사실이 또 있을까? 크리스토는 데이비드 카퍼필드처럼 의사당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그 역시 마술사이다. ?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건물은 더 이상 과거의 그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장은 존재의 연속성에 단절을 도입한다.(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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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미로는 다양한 것을 상징했다. 그리스인들에게 미로는 영웅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로마인들이 하던 '트로이에 루수스'는 말 다루는 솜씨로 성인이 되었음을 인정받는 의식이었다. 성당의 바닥에 그려져 있던 중세의 미로는 세상의 죄를 씻고 성소로 들어가기 위한 정화의식이었다. 선택과 미혹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근대의 미로는 무지의 어둠 속에서 이성의 빛으로 길을 찾아내는 과학정신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미로는 카프카나 보르헤스, 뒤렌마트의 작품이 보여주듯이 대개의 경우 출구가 없는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알레고리로 상정된다.(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