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워크룸, 2019.

시월의숲 2020. 1. 18. 19:10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자신을 기억해 내려는 행위는 무용하며 오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감각을 따라가는 것만이 최선임을, 우리는 곧 알아차렸다.(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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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사람을 볼 수 있어. 그가 어디 있는지도 알아. 하지만 그를 만나는 건 당신의 일이야.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오직 당신이 그 사람을 알아본다는 사실이니까. 알아보지 못한다면, 만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갈 수가 있나요?"

 "우루, 당신은 그 사람에게 가지 않아. 그 사람을 찾지도 않아. 그 사람과 마주치는 거지. 그래서 그 사람을 알아보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어. 내 말을 믿어."(26~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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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 없는 집이다. 나는 돌 던져진 집, 불태워진 집이다. 경외심을 일으키는 추문의 집이다. 나는 페스트가 발발한 집이다. 주방 화덕에서 건져 낸 불붙은 장작으로 모든 벽과 문을 그슬리는 정화 의식을 행한 집이다. 나는 최후까지 유예된 서류이며 영영 읽히지 않은 원고다. 영원히 되풀이해서 새로이 쓰여야만 하는 한 권의 책이다. 나는 홀로 집에서 나와 홀로 집으로 들어가고, 그 누구도 식사에 초대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혁명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전복하지 않는 전복의 음모를, 목적지 없는 내 여행을 숨긴다. 내 음모와 여행은 무기한 연기되거나 혹은 영원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게 될 산등성이의 굽이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미친 말을 타고 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투성이 편지가 잘못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 꺼진 집 안으로 스며든 달빛 속에서 두 팔을 늘어뜨리고 홀로 앉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매장되지 않은 죽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우루이기 때문이다. 우루는 잠든 머리를 완전히 숙인 자세로, 어린 시절에 부러진 목뼈를 흔들며 간다.(5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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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일생의 기억은, 자신을 유일하고도 온전한 전체로 주장하는 단 하루의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하루의 기억이, 살을 찢듯이 강렬하게 망각 속에서 분출했다. 마치 내가 일생 동안 그 하루를 살아왔던 것처럼. 내 일생이 오직 그날 하루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태어난 이후 매일매일, 오직 그 하루를 반복해서 조금씩 다르게 살아왔던 것처럼.(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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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수록 오래전에 있었던 놀라운 일들, 젊은 날의 자신을 모종의 충격에 빠뜨렸던 일들에 대해서 점점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고, 사실은 오늘 하루도 종일 그런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을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고, 여자가 불쑥 고백한다.

 "사실, 나는 그것을 쓰기 위해서 멀리 온 것 같아요."

 그리고 손님이 요청하기도 전에, 여자는 침실에서 노트를 가져와 자신이 쓴 글을 읽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천천히, 주저하면서. 그러나 곧, 여자는 읽기에 몰두하여 손님의 존재를 거의 잊는다. 아니, 누군가에게 글을 읽어 주는 자신을 잊고, 오직 내면의 언어로, 내면에 잠긴 얼굴로 회귀해 버린다.(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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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는 아무에게도, 그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것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주어지는 유일한 사건일 것이므로. 누구에게나 반드시 단 한 번 그런 순간이, 그 누구도 두 번은 체험할 수 없는 순간이 닥친다고,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루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때임을, 인간이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유일하다는 것은 비밀을 의미했다. 외부를 향해서는 물론 운명의 당사자에게조차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종종 비밀의 한가운데서 사람은 비밀의 결핍을 앓았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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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우루는 자신이 갓난아기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이른 나이에 초경을 시작한 소녀의 몸으로 이 세상에 왔음을 느낀다. 인간은 기억과 함께 비로소 태어난다고, 그렇게 믿는다. 최초의 기억, 그것은 피와 함께 시작되었다.(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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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는 과거를 본다. 기억이란 과거를 보는 일이다.

우리가 기억한다는 행위는 비로소 과거를 보는 일이다. 우루가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일 때, 암흑이 우루를 본다.(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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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가고 있을 때면, 종종 언뜻언뜻 시야를 스치며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니까요." 하고 요나스 메카스는 영화에서 말했다. "그런데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요?" 의례적인 인사도 없이, 우루가 물었다. "아름다움은 후회하는 것입니다." 하고 그가 대답했다. 의례적인 인사는 없었다. 그들은 죽는 날까지 한 번도 만난 일이 없고,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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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내가 너를 바라보고, 너의 목소리를 들을 테니까. 연극이 끝나는 날까지. 연극이 정말로 끝나는 날까지.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느냐고? 그건, 삶은 발명되어야 하고, 아름다움은 후회하는 것이기 때문이야.(1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