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반비, 2017.

시월의숲 2019. 12. 15. 21:10

정신과 육체, 내면의 성찰과 사회의 결성,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도시와 시골, 개인과 집단. 이 양쪽은 대립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립하는 듯한 두 항이 이 책에서는 보행을 통해 하나로 연결됩니다. 결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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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꾸 이 길로 돌아왔다. 일을 쉬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고, 일을 하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다. 생산 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 일도 안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슨 일을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 것이다.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에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숨을 쉬는 것, 심장이 뛰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보행이다. 보행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생각과 경험과 도착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육체노동이라고 할까. 수년간 걷기를 다른 일의 수단으로 삼아왔던 내가 걷기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상적으로 볼 때, 보행은 몸과 마음과 세상이 한 편이 된 상태다. 오랜 불화 끝에 대화를 시작한 세 사람처럼. 문득 화음을 들려주는 세 음표처럼. 걸을 때 우리는 육체와 세상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육체와 세상 속에 머물 수 있다. 걸을 때 우리는 생각에 빠지지 않으면서 생각을 펼칠 수 있다.(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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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걷는 사람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 홀로 걷는 사람의 존재 방식은 노동자나 거주자나 한 집단 구성원의 유대감보다는 여행자의 무심함에 가깝다.(4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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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 사람은 주변 세계와 함께 있으면서도 주변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다. 밖에서 구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에서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걷는 일 자체가 이 가벼운 소외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혼자 걷는 사람이 혼자인 것은 걷고 있기 때문이지 친구를 만들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48~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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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곤 한다. 실제로 여행을 떠나는 일은 그 비유를 구체화하는 행위, 몸과 상상력을 통해 인생을 구현함으로써 세상의 지형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힘든 길을 따라 어떤 먼 곳으로 걸어가는 사람은, 인간이란 넓은 세상 속에 홀로 있는 작은 존재, 그저 육체의 힘과 의지의 힘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한눈에 그려 보여주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순례는 구체적인 목적지에 도착함으로써 유익을 얻으리라는 소망으로 빛나는 여행이다. 순례자가 목적지에 닿았다는 것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함으로써 무수한 여행과 변화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 종교의 일부가 됐다는 뜻이다.(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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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이야기와 한 번의 여행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이야기가 있는 글을 쓰는 일이 걷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상상의 영토에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 혹은 익숙한 길 위에서 새로운 면들을 가리켜 보이는 일이다. 글을 읽는 일은 저자라는 가이드를 따라가는 일이다. 우리가 그의 말에 항상 동의하거나 그를 항상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이드가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다주리라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내가 쓰는 모든 문장들이 한 줄로 멀리까지 이어지면서 글이 곧 길이고 독서가 곧 여행임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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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가 땅을 여러 조각으로 구분하는 경계선에 주목한다면, 보행은 유기체 전체를 이리저리 연결하는 일종의 순환계로서의 길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소유와는 상반된다. 보행은 땅을 소유하는 대신 땅을 경험한다. 움직이는 중의 경험,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경험, 모두와 함께 나눌 수 있는 경험이다. 유목민들의 이동 생활이 국경에 구멍을 냄으로써 국가주의를 어지렵혔다면, 보행은 사유지 울타리라는 작은 국경을 상대로 똑같은 작용을 하고 있다.(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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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열심히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미묘한 상태가 있다. 고독을 즐기는 상태라고 할까. 별들이 밤하늘 여기저기에 마침표를 찍듯이, 우연한 만남이 어두운 고독에 마침표를 찍는다. 시골의 고독에는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라는 지리적 이유가 있으며, 사람 이외의 존재들과 교감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편 도시에서 사람이 고독한 이유는 낯선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에 둘려싸인 낯선 사람이 되어보는 일, 비밀을 간직한 채로 말없이 걸어가면서 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을 비밀을 상상하는 일은 더없는 호사 중 하나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들 앞에 열려 있다는 것은 도시생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고, 가족의 기대, 공동체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 하위문화 실험, 정체성 실험을 시도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해방적 상태이기도 하다. 아울러 관찰자의 상태(냉정한 상태, 대상에 거리를 둔 상태, 예민한 감각을 발휘하는 상태)이기도 하고, 성찰해야 하는 사람, 창작해야 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상태이기도 하다. 약간의 우울, 약간의 고독, 약간의 내성은 삶의 가장 세련된 재미에 속한다.(301~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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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길거리를 걸어 나가는 그 순간, 모종의 대중주의적 합일이라는 흔치 않은 마법 같은 가능성이 찾아온다. 그런 가능성을 교회나 군대나 스포츠 팀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교회에는 시급함이 부족하고, 군대나 스포츠 팀에서는 꿈의 고귀함이 부족하다. 그런 가능성의 순간, 거대한 집단적 욕망, 분노라는 모종의 거대한 강물이 저마다의 정체성이라는 작은 웅덩이들 위로 범람한다. 웅덩이는 더이상 두려움도, 자의식도 없이 그 반란의 물결에 기꺼이 휩쓸린다. 개체가 자기와 같은 꿈을 꾸는 다른 개체들을 만나는 순간이요, 이상이나 분노가 두려움을 극복하는 순간이요, 자기 안에 있었던 놀라운 힘을 느끼는 순간이다. 한마디로 말해, 영웅이 되는 순간이다. 영웅이란 두려움을 잊고 이상의 힘으로 움직이는 사람, 우리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 선을 위해 힘을 내는 사람이잖은가? 항상 이런 기분으로 사는 사람은 굉신자나 어쨌든 성가신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살면서 이런 기분을 한 번도 못 느껴본 사람은 냉소와 고립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된다. 그런 가능성의 순간, 모두가 예견자가 되고 모두가 영웅이 된다.(367~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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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는 것은 육체가 어떻게 세상을 만들어가는가의 문제인 반면, 운동을 하는 것은 육체가 어떻게 육체를 만들어가는가의 문제다. 이것은 헬스장 이용자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그저 헬스장이 좀 이상한 곳이 아니냐는 자문이다. 육체노동이 사라진 세계에서 헬스장은 가장 쉽고 효율적인 대체물을 제공해주는 반(半)공공장소다. 그러나 이 대체물에는 어딘가 당혹스러운 면이 있다. 나는 이런저런 헬스 가구를 사용하면서 이 동작은 노 젓기, 이 동작은 물 긷기 , 이 동작은 곡식자루 들기라고 상상하곤 했다. 농장의 일상이 내용 없는 동작으로 재연돼 있었다. 퍼 올릴 물도 없이, 퍼 올릴 때 쓸 두레박도 없이. 내가 농부나 농장노동자의 일상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동작들을 일상의 쓸모와 무관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이상하다는 느낌을 피할 길이 없다. 기계가 우리를 위해서 물을 길어주게 됐고 우리는 또 다른 기계를 이용해 물 긷는 동작을 재연하게 됐다. 물 긷는 동장은 이제 물을 긷기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명목상 기계 기술력에 의해 해방된 육체)를 위하는 일이 됐다. 이 변화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의 근육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관계가 사라졌을 때, 물을 길어주는 기계가, 근육을 키워주는 기계가 따로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420~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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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은 인간 문화라는 밤하늘의 성좌로 자리잡았다. 그 성좌는 육체, 상상력, 드넓은 세상이라는 세 별로 이루어져 있다. 세 별은 각각 따로 존재하지만, 보행의 문화적 의미라는 하나의 선이 별들을 이어 성좌로 만든다. 성좌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설정이다. 별과 별을 잇는 선, 곧 성좌는 과거 사람들의 상상력이 지나간 길이다. 보행이라는 성좌에는 역사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시인들과 철학자들과 반란자들, 무단횡단자들과 호객 창녀들과 순례자들과 관광객들과 정글 탐험가들과 등산가들이 두 발로 디뎌서 만든 역시다. 다만 이 역사에 미래가 있는가 여부는 아직 그 길들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465~4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