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숨,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문학동네, 2019.

시월의숲 2020. 1. 27. 22:16

"뭐에 대해 쓰고 싶은데?"

"나무……"

"나무에 대해 쓰려면 나무를 생각하지 않아야 해."

"나무를 생각하지 않고 나무에 대해 어떻게 써?"

"나무를 몰라야 해."

"나무를 모르는데 나무에 대해 어떻게 써?"

"나무를 모른다는 것도 몰라야 해."(26~27쪽)



*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왜 없는 게 아니라 있는가?

나무들도 스스로에게 묻고는 할까?(69쪽)



*



"나무는 자신이 태어난 자리와 죽는 자리가 같은 존재야. 태어난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죽음을 맞는……"

그는 메타세쿼이아들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천이백 킬로미터야……"

"이 메타세쿼이아들이 이동한 거리 말이야. 당신 말대로 한자리에 서 있는 존재가 어느 날 뿌리 들려서 천이백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날아온 거야."

나는 그가 날아가지 못하게 그의 발등에 못이라도 박아 넣고 싶었다. 그를 내 옆에 붙들어둘 수만 있다면 발가락 하나하나에.(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