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2008.

시월의숲 2022. 1. 3. 23:08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9쪽)

 

 

*

 

 

"당신 여자 친구들은 모두 바지만 입나 보군요."

"저는 그런 사람 없는데요." 그가 말했다.

"여자 친구가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됐죠?"

"모르겠어요."

그녀는 그를 놀려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소심함과 대담함, 때로는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진지함과 즉흥성의 결합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신비로운 태도와 나직한 어조로 "모르겠어요."라고 하다니.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에 대해 그렇게 전반적으로 무관심해진 게 언제부터인 것 같아요?"

"그건 오히려 제 본질에 가까울 겁니다. 친절하지만 지나치게 낭만적인 여자 친구를 한때 사귄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마흔 살 먹은 남자에게 어울리는 청춘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마흔 살에게 어울리는 청춘의 이미지란 어떤 거죠?"

"그러니까...... 그녀는 음산했고, 이를 악문 채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고, 잠에서 깨자마자 독한 골루아즈 담배를 피워 댔죠...... 그리고 사랑이란 두 피부의 접촉일 뿐이라고 제게 말하곤 했답니다."(41~42쪽)

 

 

*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저로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 그보다 더 피할 수 없는 것을 달리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 나, 나를 사랑해줘 하고 말입니다."(4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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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마치 길들여야 할 한 마리 나태한 짐승 같지 않은가.(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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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

 

 

"사실 저는 연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저는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이자 사랑에 빠진 연인이자 버릇 나쁜 아이 역할을 연기했지요. 하지만 당신을 안 이후 제가 연기한 그 모든 역할은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사랑에 대한 상당히 좋은 정의군요."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6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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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실제로 제겐 당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권리가 없습니다. 저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는 질투심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대해서만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당신을 당혹스럽게 한 건 분명합니다. 이제 저로부터 벗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소송 사건 때문에 상사와 함께 시골로 떠납니다. 상사 친구의 집인 낡은 시골집에서 머물 겁니다. 침대에서는 마편초 향이 나고 방에는 불이 피워져 있고 아침마다 창문 앞에서는 새들이 노래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번만큼은 목가적인 청년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곁에서 잠을 잘 테니까요. 난롯불 빛을 받으며 당신이 제 손 닿는 곳에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돌아올 생각을 열 번도 더 하겠지요. 당신이 다시는 저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당신의 시몽.'(73쪽)

 

 

*

 

 

그는 자신에게 그런 인내심과 애정이 있다는 것, 자신 앞에 긴 인생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사랑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단계일 뿐, 흔히 예상하는 익숙한 결말은 아닐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 사이에는 수많은 낮과 밤이 펼쳐져 있고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 그런 생각과 동시에 그는 그녀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한 욕망을 느꼈다.(83쪽)

 

 

*

 

 

어째서 당신은 내가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를 망치기를 바라는 거지? 내가 관심 있는 건 오직 내 현재뿐인데 말이야.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해.(106쪽)

 

 

*

 

 

"나의 희생양. 나의 사랑스러운 희생양. 나의 귀여운 시몽!" 생전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불가피하게 상처입히지 않을 수 없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데에서 오는 끔찍한 쾌감을 경험했다.(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