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5

울음을 그친 것은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고, 비로소 운 것은 네 슬픔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허튼 약속 없이, 섣부른 이해 없이 아내를 슬픔에서 천천히 건너오게 하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오기는 미래의 슬픔을 이미 겪은 듯한 아내를 가만히 안아주었고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다가 그쳐가는 걸 지켜봤다.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편혜영, 《홀》 중에서)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때로 어떤 문장들은 그에 따른 생각들을 수없이 파생시킨다고. 그것을 공명한다고 하는 걸까? 그러니까 어떤..

흔해빠진독서 2025.06.21

이제 나는 햇빛에 대해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 한강의 《빛과 실》을 읽고 있다. 내 방에서도 읽고 산책을 하면서도 읽는다. 책의 두께가 얇아 아쉽지만 들고 다니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책에는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이 실려 있고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하고 난 후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최초 제목이 '새가 돌아온 밤'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득 《소년이 온다》 첫 번째 장의 제목이 '어린 새'였다는 걸 떠올린다. 책에는 작가가 여덟 살에 쓴 시도 실려 있다.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여덟 살의 작가가 쓴 시처럼, 모든 게 금실처럼 연결되어 있는지도.(20250504) *책에 실린 '정원 일기'를 읽는다. 그가 북향 정원에 심었다는 식물이 미스김라일락, 불두화, 옥..

흔해빠진독서 2025.05.08

개 이전에 짖음

이 산책로는 와본 적이 없는데 이상해.다정한 편백나무들 그림자들 박쥐들가지 않은 길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어요?만나지 않은 사람과 헤어진 적은? 어제는 죽은 사람과 함께 걸어갔는데마치 죽지 않은 사람처럼 그이가 내 팔짱을 끼었는데내 팔이스스르 녹아갔는데 기억하나요? 여기서 우리는 보자기를 바닥에 깔고 앉아 점심 식사를 했었잖아요. 보자기라니 정말 우스워.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죠. 오래전에 죽은 강아지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는데 대낮이고 사방이 캄캄하고 처음 보는 길이었지. 길을 잃기에 좋은 길이었다. 이미 죽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왈왈, 짖고 싶은 기분이었다가 아마도 나는 당신의 미래의 오후의 꿈속에조용한 기억에 담긴잼 같은 것인가 봐요끈적끈적 흘러내리나요.달콤한가요. 강아지 한 마리가 왈왈..

질투는나의힘 2025.03.30

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2013년 2월 1일에는 비가 왔나 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조용미의 시집을 읽고 있었던 것 같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니, 그날은 비가 왔고 나는 조용미의 《기억의 행성》을 읽었다. 당시 내가 쓴 글을 2025년 2월의 내가 다시금 읽고 있으므로. 시인은 〈기억의 행성〉이라는 시에서 '지구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기억'이라고 썼다.   나는 기억의 행성인 지구에 속해있지만, 내 기억은 늘 불완전하다. '지구 전체의 기억은 많지만 우리가 쓸 수 있는 기억은 극히 적'고 '기억의 행성 지구는 사실 기억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지구는 결국 변형된 기억으로 남게 된다고. '신성한 지구만 우주의 기억 속에 남게' 될까?   사라진 기억에 대해서 생각한다. '기억'은 사라지고, 사라졌다는 사실만..

흔해빠진독서 2025.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