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 12

어쩌면 이곳은

출근길,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하는 것은 새들의 지저귐이다. 나는 건물에 들어가기 전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본다. 희한하게도 새들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선명하다. 그런데 그 소리가 무척 경쾌하여 잠이 다 달아날 정도다.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 무겁던 출근길이 한층 가벼워진다. 그러다 오늘 오후 잠시 머리를 식히러 건물 밖을 나왔다가 새들을 보았다. 새들은 여전히 경쾌한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자 거기 거짓말처럼 아주 작은 새들이 건물의 구석구석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곳은 원래 저 새들의 집이었는지도 몰라. 나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는 온통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나무들이 ..

어느푸른저녁 2025.05.27

계시록

"서로 연결성, 연관성이 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일정한 규칙이나 패턴, 의미를 찾는 거죠. 그냥 자연현상인데 특징적인 무언가 보인다고 믿는 거죠. 이런 사람들은 배가 떨어지면 기어이 까마귀를 만들어냅니다."(연상호 감독, 《계시록》 중에서) *계시라는 말은 매력적이다. 그 말은 지리멸렬한 내게도 무언가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가끔 계시라는 말을 쓴다. 쉽게 일어날 것 같지 않는 일이 우연하게도 연이어 발생했을 때, 혹은 스치듯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내 앞에 현실로 나타났을 때, 이것은 계시가 아닐까?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계시라는 말에는 위계가 있고, 설명할 순 없지만 어떤 영적인 존재의 특별한 힘이 느껴지는 것 같고, 그리하여 기대감이나 영감 등으로 한순간..

봄날은간다 2025.05.24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하버드대 교수이자 정치학자라고 하는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지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읽었다. 이 책은 2017년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에서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직감하고 쓴 책으로 보인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 신호는 그 이전부터 있어 왔겠지만(저자들은 민주주의가 붕괴된 여러 나라들의 사례를 들며, 그런 위험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제시한다), 트럼프가 당선되면서부터 더욱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자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가 이 책을 쓰게 된 큰 동기였을 것이다. 얼핏 미국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게 지엽적이지는 않다. 미국을 포함하여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을 예로 들어가며 민주주의의 보편적인 위기 상황에 대해서 이..

흔해빠진독서 2025.05.20

단상들

*'월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은' 지나간다. 내 삶의 월요일 하나가. 애정과 증오의 월요일 하나가.(20250428) * 이제 곧 녹색이 파도처럼 쏟아질 것이다. 나는 늘 녹색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연두색이랄까, 옅은 녹색이 아니라 아주 진한 녹색, 검은색에 뿌리를 둔 녹색에 대해서. 어둠으로써의 녹색 혹은 녹색의 어둠, 그 침묵에 대해서. 하지만 나는 늘 그것에 대해서 생각할 뿐이다. 이제 곧 도래할 녹색으로 가득한 침묵의 세계에 대해서.(20250428) * 파도는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이고, 쏟아지는 것은 폭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쏟아진다는 말이 떠올랐는데, 왜 폭포가 아니라 파도가 생각났을까. 뭐, 아무렴 어떠냐마는.(20240429) * 도서관에서 무료 나눔 한 책을 왕창 가..

입속의검은잎 2025.05.16

어떤 습관

"내가 담배를 피우는 건 중독이라기보다는 그냥 습관인 것 같아요. 흔히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곤 하지만 말이죠." 그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나는 중독이 된다는 게 곧 습관이 된다는 말이 아닐까 싶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다 스트레스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가 흘러갔다. 나는 그에게 "담배는 그렇다 치고, 술도 못 마시는데 스트레스를 뭘로 풀어요?" 하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나는 탁구를 치잖아요." 하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탁구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크고 작은 대회도 참가하는 등 실력이 꽤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번엔 그가 내게 물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떻게 풀어요?" 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 역시 술도 잘 마시지 않고, 담배도 안..

어느푸른저녁 2025.05.14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어크로스, 2018.

냉전이 끝나고 민주주의 붕괴는 대부분은 군인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이뤄졌다.(11쪽) *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극단주의자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성 정당이 두려움과 기회주의, 혹은 판단 착오로 인해 극단주의자와 손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13쪽) *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비극적인 역설은 그가 민주주의 제도를 미묘하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합법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죽인다는 사실이다.(14쪽) * 민주주의 붕괴에 관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양극화가 민주주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16쪽) * 잠재..

이제 나는 햇빛에 대해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 한강의 《빛과 실》을 읽고 있다. 내 방에서도 읽고 산책을 하면서도 읽는다. 책의 두께가 얇아 아쉽지만 들고 다니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책에는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이 실려 있고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하고 난 후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최초 제목이 '새가 돌아온 밤'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득 《소년이 온다》 첫 번째 장의 제목이 '어린 새'였다는 걸 떠올린다. 책에는 작가가 여덟 살에 쓴 시도 실려 있다.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여덟 살의 작가가 쓴 시처럼, 모든 게 금실처럼 연결되어 있는지도.(20250504) *책에 실린 '정원 일기'를 읽는다. 그가 북향 정원에 심었다는 식물이 미스김라일락, 불두화, 옥..

흔해빠진독서 2025.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