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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바람이 말하게 하라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바람이 말하게 하라. 에즈라 파운드는 《칸토스》에서 그렇게 썼다'라고 배수아는 《바우키스의 말》에 썼다. 나는 그 말을 다시 쓴다. 내가 무언가를 읽고 쓴 모든 것들은 그것을 쓴 자의 말을 다시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그가 쓴 말로 말한다. 그가 쓴 말로 내 말을 대신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느낀다. 그것에 희열을 느낀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의 말에 담긴 아름다움을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한 채 쓰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가 말하게 하라' 여기서 '그'는 내가 읽은 배수아 혹은 페소아다. 혹은 수많은 다른 이름들이다. 아, 오해하면 안 된다. 내가 말한 아름다움은 그저 통상적인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포..

어느푸른저녁 2025.01.27

바우키스의 말

"이승과 그리 멀지 않은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 봐 겁났던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가 뒤에 오는지 봤다. 아내는 팔을 뻗어 남편을 안으려 했지만 그 안타까운 손은 허공만 잡을 뿐. 다시 죽은 그녀는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사랑이 무슨 죄겠는가? 그녀는 그에게 닿을 수 없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다시 저승으로 내려갔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중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본 후 나는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떠올렸다. 아니다.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읽고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최근에 본 그 영화가 떠올랐다는 게 맞는 말이다.(물론 선후 관계가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게 있다면 영화가 소설을, 소설이 영화를 생각나게..

흔해빠진독서 2025.01.25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영화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였다. 영화의 매 장면이 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초상화요, 풍경화요, 정물화처럼 느껴졌다. 몇 명 되지 않는 등장인물과 군더더기 없이 말쑥한 영화 속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주인공의 직업인 화가라는 설정과 어우러져 영화 전체가 하나의 움직이는 그림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원래부터 움직이는 그림을 영화라고 부르지 않는가? 물론 활동사진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말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그린 이 그림은 그저 그림은 당연히 아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나는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이 그림은 영화 속에서 마리안느가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화처럼, 서서히 곁에 다..

봄날은간다 2025.01.23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문학동네, 2016.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9쪽)  *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

배수아 - 모공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대사...하이너 뮐러의 희곡은 "읽어야" 한다

오직 감탄하게 되는 언어가 있다. 줄거리에의 몰입, 적당한 정서적 공감, 독서 배경이 뒷받침되는 지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오직 언어 자체에 매혹당하는 체험.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잘 알게 되기도 전에, 짧고 순간적일지라도 거의 육체적으로 느껴지는 전율의 체험. 내게 그런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작가 중 하나는 하이너 뮐러이다. 하이너 뮐러는 희곡작가로 알려졌지만 그가 남긴 산문과 시도 희곡 못지않게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뮐러의 희곡이 정치적인 의미나 미학적인 수준에서 비평가들의 관심을 너무도 많이 차지해버리는 바람에 도리어 그의 시나 산문들이 합당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보는 평가도 있다. 그의 산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산문의 개념과는 좀 동떨어진 것이 많다. 길이가 극도로 짧으면서 막간극을 연상시키는..

Yo-Yo Ma - J.S. Bach's Cello Suite No. 1

*이상 기후로 겨울이 이젠 겨울 같지 않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이라서 그런가. 올 겨울이 유난히 차갑고 시리게 느껴진다. 물론 겨울이 겨울 같고, 여름이 여름 같고, 봄이, 가을이 다 제 계절만 같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푸릇푸릇한 숲의 기운을 느끼고 싶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봄바람을, 여름의 풍성한 녹색 숲을 바라보고 싶다. 이 영상을 보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그렇지만 나는 안다. 이 혹독한 겨울은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지금도 지나가고 있고), 우리는 마침내 바라마지 않던 따뜻한 봄날의 생기를 맛볼 수 있을 것임을. 지금은 앞으로 있을 더 큰 기쁨을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임을.

오후4시의희망 2025.01.19

배수아 - '내 이익을 해치는 자는 죽여도 좋다'는 나치즘을 고발했다 금서가 된 '이 책'

나는 서른네 살의 김나지움(독일의 중등 교육기관) 교사이다. 열네 살 난 소년 스물일곱 명에게 역사와 지리를 가르친다. 나는 부유하지 않고 나이 든 부모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편이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심한 불안의 시대에 종신연금이 보장되는 공립학교 교사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 학생이 쓴 작문이 발단이었다. 감독관청에서 내려온 주제인 '독일은 왜 식민지를 가져야 하나?'로 쓴 작문이다. 학생 N은 이렇게 썼다. “검둥이는 모두 교활하고 비열한 데다 게으르기만 하다.” 나는 이것을 읽는 순간 당장 붉은 잉크로 삭제하고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지 지적을 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는다. N의 ..

배수아 - 조현병 아들, 떠나간 애인…브라질의 ‘여성 카프카’는 고립 속에 이 신비한 소설을 썼다

새로운 종류의 여행법을 나는 독일 베를린 서가의 주인에게서 배웠다. 그것은 죽은 작가와 책을 향해 떠나는 여행, 여행을 통한 읽기이다. 그의 여행이 책이나 작가, 혹은 예술작품으로부터 유발되지 않은 경우란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의 브라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2015년 우리는 상파울루 공항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내게 한 권의 책을 건넸다. 내가 거기 있으므로, 거기서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했다. 이유는 그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서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작가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제목의 책이었다. 첫 페이지에는 짧은 작가의 말이 있었다. 그 첫 문장은 이랬다. “이것은 수많은 다른 책들과 다르지 않다.” 이 문장이 초대인 동시에 경고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