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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을 읽고 감상문을 쓴 후, 우연히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와 관련한 유튜브를 보았다. 과거 방송작가였다고 밝힌 유튜버는 한강의 오랜 팬이고, 자신의 방송에 한강 작가가 나와서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한강 작가의 책을 소개하며 한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바람이 분다, 가라』의 한 구절이었다.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그것이 별의 생리이자 운명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별로부터 왔다. 별들과 같은 생리와 운명을 배고 태어난 인간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다가 죽는다. 다른 것은 생애의 길이뿐이다.(17쪽) 그가 읽어주는 저 대목을 들었을 때, 나는 무언가 찌릿한 느낌..

흔해빠진독서 2024.10.20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을 그 여자에 대하여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은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자신이 아는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화자(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여자를 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보면 그는 그 여자와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곧 그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 여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유예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끝은 마치 행성의 폭발처럼 눈부신 잔향을 남긴다. 어쩌면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리라.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다른 결말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므로.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해서 생각한다. '별의 시간'에 대해서. 이 소설에서 등..

흔해빠진독서 2024.10.20

너무 쉬운 이야기

아버지는 늘 너무 쉽게 이야기를 한다. 임윤찬이나 이세돌을 보며,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와 바둑을 배웠는데 그 정도도 못 치겠니,라는 등의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는 그렇게 쉽게,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어느 정도는 허풍이겠지만) 이야기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리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 일단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로. 두 손가락으로 '학교종' 치든, 운동을 위해 5분을 걷든, 일단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라고. 그게 먼저라고. 나는 한강이나 임윤찬, 혹은 이세돌이 될 수 없고, 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그저 책이 있으면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고 싶으면 쓰고, 길이 보이면 걷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

어느푸른저녁 2024.10.18

침묵의 뿌리

숲은 온갖 소리들로 가득하다. 새소리, 매미소리, 풀벌레 소리,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낙엽 부서지는 소리, 갈대 흔들리는 소리… 숲은 온갖 소리들의 향연으로 쉴 새 없지만 결코 시끄럽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고요함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숲의 소리는 침묵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숲에 어둠이 내리면, 숲은 거대한 하나의 동물이 된다. 숲의 어둠 속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은 나를 응시한다. 어둠은 침묵을 더욱 깊게 만들고 소리 또한 선명하게 만든다. 낮의 숲과 밤의 숲이 다르듯, 낮의 소리와 밤의 소리 또한 다르다. 호젓한 숲길을 혼자서 걷는다. 온갖 소리들로 가득한 어둑한 숲길을. 거대한 동물의 긴 호흡을 듣는다. 그 침묵의 뿌리를 만진다. 그 속에 들어갈 수..

어느푸른저녁 2024.10.17

단상들

* 조금만 신경(스트레스)을 써도 몸이 먼저 반응을 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20240930)  * 문득 윤성희의 단편, 「그 남자의 책 198쪽」이 떠올랐다. '공원에서 잡동사니 물건을 파는 사람'이 나왔지 아마. 그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모든 것이 다 희미하지만, 어째서 이 사진을 보고 바로 그 소설을 떠올렸을까. 기억이란 참 알 수 없다.(20240930)  * 누군가 내게 "너도 사랑을 하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20241001)  * 말은 어떤 힘이 있을까. 나를 걱정하는 말들이 내게 어떤 소용이 있을까. 나는 늘 말이 가진 힘에 대해서 생각했다. 말은 우리를 구속하고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친다고..

입속의검은잎 2024.10.17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1은 덜컹거리면서도 응축된 감정의 폭발이 매력적인 영화였다. 이번에 나온 조커 2편이라 할 수 있는 '폴리 아 되'에서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물론 1편에서 인상적으로 보여준 조커의 내면세계를 어떤 식으로 더 보여줄 수 있을까에 관심이 가긴 했다. 하지만 는 조커의 내면을 더 파고들지도 못했고, 조커를 둘러싼 사건의 양상을 좀 더 재미있게 만들지도 못했다(할리 퀸이라는 특급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조커와 아서 플렉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결국 이도저도 아닌 영화를 만들어내고 말았다(아서 플렉이 조커이고 조커가 아서 플렉이지만, 영화는 자꾸 이 둘을 갈라놓으려 한다.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은 그게 아닐까?). 뮤지컬이라는 형식과 그에 따라 선택된 노래들은 매우 ..

봄날은간다 2024.10.09

공작

파블로 라라인이라고 하는 칠레의 영화감독이 만든 뱀파이어 영화 《공작》을 보았다. 감독 이름이 생소하여 필모를 찾아보니, (아직 보지 못했지만) 《스펜서》와 《재키》의 감독이기도 했다. 어쨌든 뱀파이어 영화라는 것만 알고 보게 된 이 영화는 생각보다 독특했고 때로 우아했다. 흑백 영화이기에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흡혈귀라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역사에 대한 우화(풍자극)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이백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대를 풍미하며 살아온 그가 죽음을 결심하지만 결국 흡혈귀라는 본성에 따라 다시 피와 심장을 갈아 마시며 생명을 이어간다는 이야기다. 수많은 학살과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부유하게 살던 피노체트, 결국 돈 때문에 그를 죽이..

봄날은간다 2024.10.05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별의 시간》, 암실문고, 2023.

나는 살기 위해 타인들을 필요로 하므로, 나는 바보이므로, 나는 완전히 비뚤어진 자이므로, 어쨌든, 당신이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그 완전한 공허에 빠져들기 위해 명상 말고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명상은 결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명상은 그 자체만으로 목적이 될 수 있다. 나는 말없이, 공허에 대해 명상한다. 내 삶에 딴죽을 거는 건 글쓰기다.(8쪽)  *  나는 세상을 짊어지고 있으며 그 일에는 어떠한 행복도 없다. 행복? 나는 그보다 멍청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18쪽)  *  그렇다, 나의 힘은 고독에 있다. 나는 폭우나 거센 돌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밤의 어둠이니까.(29쪽)  *  우리는 오직 현재 속에서만 산다. 그건 언제나 영원히 오늘이기 때문이고, 내일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