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3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설 연휴 전, 주말을 낀 삼 일간의 연휴 동안 나는 혼자, 집에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이 책을 읽었다. 삼 일간의 공식적인 설연휴가 시작되기 전 내게 주어진 달콤한 휴일이었고(설이 끝난 뒤 더 쉬었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그 기간 동안 나는 내가 책 한 권을 다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어떤 이는 하루에 한 권 혹은 몇 시간 만에 한 권은 우습게 읽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삼일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다는 것은, 내 독서 경험에 비추어 하나의 커다란 사건(혹은 성취)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읽은 황정은의 소설이었다. 오래전에 읽은 단편집들과 《百의 그림자》, 《계속해보겠습니다》 같은 장편 소설을 읽고 느꼈던 황정은 스타일에서 풍기는 느낌과는 사뭇 다른 듯했지만,..

흔해빠진독서 2025.02.02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황정은의 『백百의 그림자』를 읽었다. 나는 이 소설을 무재와 은교의 사랑 이야기로만 읽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읽는다는 건 은교와 무재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소설은 그들의 사랑을 절제된 문장으로 꾹꾹 눌러 담고 있지만, 그들을 둘러싼 암울하고 허망한 상황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그 속에서 그들의 행보가 좀 더 빛 쪽으로 한걸음 다가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에 자신이 먹히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지는 않도록. 사람들이 슬럼가라고 부르는 곳에서, 곧 철거가 될 건물에서 근근이 삶을 이어온 사람들에게 그곳은 일터 이상의 장소일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라나 그곳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부모가 진 빚..

흔해빠진독서 2022.08.21

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왔다

오랫동안 나는 그 일을 생각해왔다. 생각하고 생각해 마침내는 이해해보려고 나는 이 방에 머물고 있다. 오래전, 이 방 바깥에서 내 등을 두드리며 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이가 누구였는지 모르겠다. 그의 이름이 뭐였는지 내가 어쩌다 그 사람을 만났는지 그가 내게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조차 기억해낼 수 없다. 밤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컴컴한 모퉁이에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나를, 나는 왜 이해할 수 없는가.(황정은, '웃는 남자' 중에서 - 소설집, 『아무도 아닌』 수록) * 오래전 황정은의 을 읽었을 때만 해도 나는 이 작가에 대한 막연한 인상만을 품고 있었다. 지금 그 소설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흔해빠진독서 2022.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