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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들

*나는 잠으로 도피하고 싶은 걸까, 잠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걸까?(20240901)  * 잠이 너무나 쏟아져 쓰러지듯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저녁이 되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린다. 귀뚜라미일까? 구월은 잠과 풀벌레 소리로 시작된다.(20240901)  * 아파트에 귀뚜라미가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20240902)  * 저는 늘 적응하느라 애쓸 따름입니다. 늘 적응만 하다가 볼일을 다 보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기는 합니다만.(20240902)  *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당신의 마음이 편할 대로 하세요. 그는 몇 번이고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것, 편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거절이나 사양..

입속의검은잎 2024.09.18

사악한 목소리

베일처럼 덧씌워진 타자의 정체성, 끝없이 현재를 침습하는 과거, 기억의 유령. 반듯한 정상이라 이름한 양태는 너울처럼 덮쳐오는 불안한 이질성에 일그러지고 휘어져 섬뜩하게 낯선 이면을 드러낸다. 인식의 낙차에서 탄생하는 새롭고 섬뜩하고 무서운 것들은 위험하고 또 매혹적이다. - 버넌 리, 『사악한 목소리』 중 옮긴이 김선형의 해설 중에서  *생소한 작가의 작품을 읽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이번에 읽은 버넌 리라는 작가의 작품도 그랬다. 제목 또한 '사악한 목소리'가 아닌가. 유혈이 낭자한 호러 소설은 아니지만, 여름에 어울리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 길고도 긴 여름의 뜨거운 습도를 견디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소설이었으므로. 세 편의 소설 모두 공통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에서는 과거에 집안..

흔해빠진독서 2024.09.08

이상은 - 삼도천

너와 나 사이에 물이 흐르고 있구나 은하수도 같고 피안의 강물도 같이 옛날 노랫소리 물줄기에 쓸려간다 너의 목소린지 내 목소린지도 모르게  오호라 햇님아 붉은 별들을 혓디뎌 버려라 시려운 강으로 몸을 담궈 물을 태우렴 오호라 바람아 치마를 흔들며 춤을 추어라 햇님이 태운 물먼지를 훨훨 날리렴  그러나 바람은 잠 들고 해는 지네 서산으로 하루가 흐르고 강 저편 위 어둑어둑 물소리에 잠기누나  귀가 멍하니 물이 흐르고 있구나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모르게  오호라 햇님아 붉은 별들을 헛디뎌 버려라 시려운 강으로 몸을 담궈 물을 태우렴 오호라 바람아 노래를 불러라 네 님도 불러라 머나먼 땅에서 흙을 실어 강을 메우렴  초록풀이 자라는 대지야 생겨나라 어서어서 꽃을 밟으며 뛰어 들리 너와 내가 만나면 ..

오후4시의희망 2024.09.08

오래된 묘지

왜 오래된 묘지일수록 높고 험한 산에 있는지 아니?  아버지가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버지는 말했다. 벌초를 하기 위해 산을 오르면서 세속의 모든 번뇌를 잊으라는 뜻이야. 정말 그런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 벌초란,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지 못한 당신 부모에 대한 속죄처럼 보였다. 본인의 몸도 성치 않음에도 매번 벌초는 직접 하려고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쨌거나 번뇌는 잘 모르겠고, 예초기를 메고, 낫을 들고, 산을 오르니 확실히 잡생각은 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생각, 육체의 힘듦에만 집중하게 된다. 세속의 모든 번뇌를 잊으라는 말이 그런 뜻이라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일 년 만에 오른 조상들의 묘는 이제 땅과 하나가 되려 하고 있었다. 내 가슴팍까지 오는 풀들은 어떤 위협 혹은 경고처럼..

어느푸른저녁 2024.09.07

단상들

*건강검진 결과를 긴장하면서 받아 볼 나이가 되었나.(20240821)  *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강아지 두 마리가 고개를 쭉 내밀고 있었다.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강아지들에게 다가갔다. 아직 모든 것들이 마냥 신기한듯한 두 눈!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20240824)  * 요즘 들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게 아니라 원래 세상은 미쳐 돌아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20240824)  * 오늘은 아버지의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 와닿지 않았다. 오늘 내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고리타분한 진리의 설파보다는 참신한 증오의 교감이었으니까. 하지만 더 따져본들 무슨 소용 있을까? 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묵묵히 밥을 먹으며 오늘따라 식당의 김치가 맛있다는 말을 했다.(202408..

입속의검은잎 2024.09.05

문학은 침묵으로 환원된 개인의 언어를 가진다

매혹에 관해서, 귀는 음악을 가지고 있다. 눈은 회화를 가진다. 죽음은 과거를 가진다. 사랑은 타인의 벌거벗은 육체를 가진다. 문학은 침묵으로 환원된 개인의 언어를 가진다.(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중에서) * 자신이 쓴 글을 가장 많이 읽어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어떤 소설가는 말했다. 문득 그 말이 생각났다. 나는 소설가도 뭣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쓴 글을 가장 많이, 가장 즉흥적으로, 우연하게 읽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읽는가?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문득 어떤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소위 '꽂힌다.' 그런데 그렇게 꽂히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작용들이 합쳐져서 발생한다. 어떤 사건, 사소한 대화, 우연한 발견, 뉴스와 여러 미디어가 ..

어느푸른저녁 2024.08.28

버넌 리, 《사악한 목소리》, 휴머니스트, 2022.

어쩔 수 없이 응대해야 하는 사람들을 그저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대했는데, 알고 보니 상대가 다른 인간과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면, 설마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요.(42쪽, 「유령 연인」 중에서 )  *  이 수수께끼처럼 신비롭고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기이한 존재는 현재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과거의 괴팍한 열정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거지요. 눈동자에 서리는 멍한 표정, 맥락도 없이 떠오르는 아련한 미소가 이해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흡사 괴상한 집시 음악에 붙여진 가사 같았어요. 동시대의 여인들과 딴판으로 다르고, 아득하게 거리가 먼 이 여자는 자신을 과거의 어떤 여인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뭐랄까, 간질간질한 연애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 모든 걸 설명했어요.(43쪽,..

단상들

* 며칠 전 S에게 "장마가 끝나서 그런지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조금 달라진 거 같지 않아요?"라고 말했더니 S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저... 아직 8월이 남았는데요."라고 말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좀 급한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8월.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20240802)  * 낮에 소나기가 지나가자 선물처럼 무지개가 떴다. 어느 하나 흠잡을 것 없는 완벽한 무지개였다.(20240807)  * 오늘이 입추다. 여름이 한창인데 입추라고 하니 기분이 묘하다.(20240807)  * 꽃은 자기가 사 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댈러웨이 부인은 손수 꽃을 사 오겠다고 했다. 꽃은 자신이 직접 사겠다고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러 가겠다고 말..

입속의검은잎 2024.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