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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진하는 삶

문득 읽지 않은 책들로 둘러싸인 방에 홀로 앉아서, 핸드폰이나 유튜브를 몇 시간씩 보고 있으니 갑자기 탕진(蕩盡)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탕진의 사전적 의미는 '모두 써서 없애다'라는 뜻인데, 써서 없애는 것에는 재물 따위뿐만 아니라 시간, 힘, 정열 등을 '헛되이' 쓰는 것도 해당된다고 인터넷 국어사전에 나와 있었다. 나는 재물이나 시간, 힘, 정열이라는 단어보다도 '헛되이'라는 말에 눈길이 갔다. 그 말이 나를 건드렸다. 나는 지금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읽지 못한 책은 끝내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일까.   나는 언젠가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지금의 나는,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다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 말을 고쳐서, 지금의 나는 내가 ..

어느푸른저녁 2025.02.19

더 클래식 - 송가(送歌) Good-bye

떠나가지 마 고운 내 사랑아직 내 곁에 있어 줘야 돼하고픈 말은 많지만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불안해하던 나의 모습을늘 웃음으로 감싸줬는데이렇게 빨리 떠나야 하니널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널 사랑해 변함없는내 사랑을 기억해너와 보낸 시간은 너무 감사해이제는 다시 올 수 없다고 해도슬픈 내 사랑 안녕꿈이었을까 지난 시간은믿을 수 없이 행복했는데준비도 없이 보내야 하니널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널 사랑해 널 사랑해내 사랑을 기억해너와 보낸 시간은 너무 감사해이제는 다시 올 수 없다고 해도슬픈 내 사랑 안녕  *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더 클래식 2집을 듣는다. 그때는 없는 용돈을 아껴서 큰맘 먹고 테이프를 사서 거의 고장 나기 직전의 카세트 플레이어로 들었다(고모의 것이었던 빨간색 카세트 플레이어가 아직도 ..

오후4시의희망 2025.02.17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중에서  *통증으로 인한 고립은, 통증과 내가 온전히 마주하게 되는 시간 속에서, 그러니까 집에서 쉬고자 하는 순간에 더욱 촉발된다. 아픔을 낫게 하기 위해 쉬는 순간, 아픔은 더 활개를 치며 다가오는 것이다. 그 순간은 나와 고통이 오롯이 마주하게 되는, 말하자면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상하다. 머리가 아프니 잠이 온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시 머리가 아프고, 그러면 다시 잠을 자고. 어제는 하루종일 그랬다. 그렇듯 맥없이 몸이 무겁고 쳐지는 경험은 ..

어느푸른저녁 2025.02.16

단상들

* 안경을 바꿨는데, 전에 쓰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을 골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관심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말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왼쪽 안경알의 도수를 높여서 약간 어지럽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되겠지.(20250201)  * 그동안 겨울인데 왜 이렇게 포근하냐고 투덜댔는데, 요즘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칼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다. 추위도 몰아서 오는구나.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님 그냥 그런 건지.(20250206)  *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들과 떠올리려 애쓰는 것들 사이에서.(20250208)  * 점심으로 뭐 먹을 게 있나 싶어 냉장고를 열였더니 설날에 만든 부침개가 남아 있었다. 문득 아직도 응달진 곳에 남아 있는 ..

입속의검은잎 2025.02.15

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2013년 2월 1일에는 비가 왔나 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조용미의 시집을 읽고 있었던 것 같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니, 그날은 비가 왔고 나는 조용미의 《기억의 행성》을 읽었다. 당시 내가 쓴 글을 2025년 2월의 내가 다시금 읽고 있으므로. 시인은 〈기억의 행성〉이라는 시에서 '지구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기억'이라고 썼다.   나는 기억의 행성인 지구에 속해있지만, 내 기억은 늘 불완전하다. '지구 전체의 기억은 많지만 우리가 쓸 수 있는 기억은 극히 적'고 '기억의 행성 지구는 사실 기억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지구는 결국 변형된 기억으로 남게 된다고. '신성한 지구만 우주의 기억 속에 남게' 될까?   사라진 기억에 대해서 생각한다. '기억'은 사라지고, 사라졌다는 사실만..

흔해빠진독서 2025.02.06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설 연휴 전, 삼 일간의 휴일 동안 나는 혼자, 집에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이 책을 읽었다. 삼 일간의 공식적인 설연휴가 시작되기 전 내게 주어진 달콤한 휴일이었지만(설이 끝난 뒤 더 쉬었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그 기간 동안 나는 내가 책 한 권을 다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어떤 이는 하루에 한 권 혹은 몇 시간 만에 한 권은 우습게 읽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삼일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다는 것은, 내 독서 경험에 비추어 하나의 커다란 사건(혹은 성취)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읽은 황정은의 소설이었다. 오래전에 읽은 단편집들과 《百의 그림자》, 《계속해보겠습니다》 같은 장편 소설을 읽고 느꼈던 황정은 스타일에서 풍기는 느낌과는 사뭇 다른 듯했지만, 그럼에도..

흔해빠진독서 2025.02.02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것 아닙니까?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것 아닙니까?" 강연에서 누군가가 인간관계에 상처받지 않는 법이 있느냐는 물음에 슬라보예 지젝이 한 말로 보인다. 영상으로 본 것은 아니고 한 장의 사진으로 보았다. 마치 인용하듯 잘라낸 한 장의 사진으로. 그 한 장의 사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법이 있는가에서부터, 완전히 고립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이며 그것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가... 완전한 고립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은둔수사처럼 속세와의 인연을 끊지 않는 이상. 만약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번뇌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관계와 그로 인해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상처. 고독이..

어느푸른저녁 2025.02.01

단상들

* 배수아 작가가 작년부터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다시 본다, 고전2〉 시리즈를 읽고 있다. 한겨울에 곶감 빼먹듯, 아까워서 한 편씩,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고 있다.(20250117)  * 산책을 하는데 백로인지 왜가리인지 모를 새 한 마리가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내 머리 위로 날아가다가 소나무 위에 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보아도 새는 보이지 않는다. 새는 나를 보고 있을까? 보이지 않는 새가 내게 가던 길 가라고 말하는 것 같아 머쓱한 기분으로 다시 걸었다.(20250118)  * 베른하르트의 글에는 치명적인 질병이 자주 등장하여 주인공의 정신세계와 언어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아마도 그 자신이 어린 시절 전쟁을 목격했고 결핵과 늑막염을 앓으며 생명을 잃을 뻔했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입속의검은잎 2025.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