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시월의숲 2005. 11. 12. 10:46

    "내 상상력의 테두리 안에는 이미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비둘기랑 분수랑 잔디랑 산책을 즐기고 있는 모녀가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풍경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 며칠 사이에 처음으로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다음에 어떤 세계로 가는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내 인생의 장미빛 광채가 전반인 35년 동안에  93퍼센트나 다 쓰여 닳아 없어졌다 해도, 그것은 그대로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나머지 7퍼센트를 소중히 끌어않은 채 이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어디까지고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왠지는 알수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하나의 책임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확실히 어떤 시점부터는 나 자신의 인생이나 삶의 방식들을 왜곡시키며 살아왔다. 그렇게 하기까지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비틀렸다면 비틀렸을 그 나름대로의 인생을 그냥 내버려둔 채 사라져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그것을 최후까지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하나 공정성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 된다. 나는 이대로 나의 인생을 뒤에 남겨두고 홀로 갈수는 없다.

 

  나의 사라짐이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슬픔을 가져다 주지 않고, 그 어느 누구의 마음에도 공백을 만들지 못한다 해도, 혹은 그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조차 못한다 해도,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다. 분명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으며 살아왔다. 심지어 더이상 잃어버릴 만한 것이 나 자신 이외에는 이제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내 안에는 상실된 것들의 잔재가 앙금처럼 남아 있어, 그것이 나를 여태껏 버텨오게 해준 것이다.

 

  나는 이 세계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자 나 자신의 마음의 동요를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슬픔이나 고독감을 넘어선, 나 자신의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듯한 깊고 커다란 물결이었다. 그 물결의 일렁임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었다. 나는 벤치 등받이에 팔꿈치를 대고 그 일렁거림을 견뎌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내가 그 누구도 구제할 수 없었던 것처럼.

 

  나는 소리내어 울고 싶었지만 울 수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나 나이를 먹었고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경험해 왔다. 세계에는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슬픔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를 향해서도 설명할 수 없고, 설령 말로 설명할 수 있다 해도 그 어떤 사람도 이해해 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런 슬픔은 다른 어떤 형태로도 바뀌지 않고 바람없는 밤에 내리는 눈처럼 그냥 조용히 조용히 마음속으로만 쌓여가는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