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애란, 《달려라, 아비》중에서

시월의숲 2006. 5. 12. 14:01

 

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 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 ─ 조그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단편,  <달려아, 아비> 중에서

 

 

* * *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상상한다. 나는 나에게서 당신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나를 상상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내 모습인 것이 이상하여 자꾸만 당신의 상상을 빌려오는 사람이다.

 

 

- 단편, <영원한 화자> 중에서

 

 

* * *

 

 

아버지는 누운 채 불빛을 세례받는다. 펑! 펑! 활짝 피는 불꽃들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거대하나 성기에서 나온 불꽃들이 민들레씨처럼 밤하늘로 퍼져나갔을 때, 아버지의 반짝이는 씨앗들이 고독한 우주로 멀리멀리 방사(放射)되었을 때.

 

  "바로 그때 네가 태어난 거다."

 

면도를 마친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거짓말"

 

 

- 단편,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