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슬퍼지려 하기 전에

시월의숲 2009. 6. 22. 18:16

일주일 전에 받은 검사에 대한 결과를 알아보러 병원에 갔다. 접수를 하고 병원 대기실에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진찰을 받으러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년층이었지만 그 중에는 중학생도 있었고 아주 어린 아이도 있었으며, 중년의 아저씨 아주머니도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 유독 나만 튀어 보인다고 생각한 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들은 모두 조금씩 구원을 바라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생각보다 젊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의사를 생각할 때 떠올릴만한 징표들을 고스란히 가진 사람이었다. 인사라는 것은 받을 줄만 알았지 할 줄은 모르며, 차갑고 냉정하며, 약간은 오만한 눈빛을 지닌 인간. 모르면 가만히 있어, 라는 말을 얼굴로 하는 인간. 그렇다고 그가 내게 무례하게 대하거나 무시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일뿐. 그는 지난 주에 내가 받은 검사의 결과물을 훑어보고는 심장이 좀 빠르게 뛰기는 하지만 큰 이상은 없다고 말했다. 계속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면 좀 더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도 했다. 나는 알았다고 말하고 병원을 나왔다. 아무 이상이 없다니. 때때로 나는 너무 아픈데.

 

일단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지난 일주일 간 내가 상상 속에 쓴 여러가지 비극적 시나리오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것들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 아픔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다시 다른 가능성과 시나리오가 있다는 말인가? 아, 정말 답답한 일이다. 아프지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시원한 것인지 답답한 것인지 모를 기분을 느끼며 병원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오면서 시장에 들러 한 개에 천원하는 핫바 비슷한 것과 불갈비치즈토스트를 샀다. 그리고는 집에 와 텔레비전을 보면서 핫바와 토스트를 먹었다. 그리고 세탁기를 돌리고, 로알드 달의 소설을 읽었다. 저녁엔 선덕여왕을 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아픈 건 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몸은 부차적인 문제인 것이다.

 

슬퍼지려 하기 전에. 그냥 생각난 말이다. 오늘 쓴 이 일기와는 상관없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슬퍼지려 하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것을 안다면 나는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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