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창비, 2010.

시월의숲 2010. 11. 15. 00:39

어떤 이들은 죽은 자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지금 페리 선착장에서 표를 사고 있으리라. 어떤 이들은 꿈에 대해서 에쎄이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과 상관없이 잠들기를 원한다.(73쪽, 「올빼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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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사로잡는다는 표현은 누가 가장 먼저 사용했을까. 뛰고 있는 심장, 살아 있는 것을 사로잡았을 때와 그렇게 사로잡혔을 때의 감정을 잘 아는 자인 그들은 사냥꾼이었을까. 그들이 따뜻한 새끼 사슴이나 토끼를 사로잡듯이. 그들은 희생물의 눈동자 속에 자기 자신을 최초로 이입시킨 자. 어디에도 출구가 없음이 너무나 명백하여 차라리 달콤하기까지 한 절대절망의 상태를 자신 안에서 상상으로 그려 보인 자. 그것을 표현이라는 방식으로 재현해낸 자들. 그렇듯 그것은 어쩌면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 사로잡는 자들에 의해서 탄생했으리라. 이미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사실상 노래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므로.(84~85쪽, 「북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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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설사 그 관계가 오류와 불확신의 열매라 할지라도. 아니 오류에 가까울수록 인간의 관계는 더욱 완전하고 더욱 자연스럽지 않았던가. 모든 관계가 다 대상을 향한 '깊은 사로잡힘'에 정직하게 기인하지 않는 것은 어느 한 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대상에 사로잡히는 대신에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힐 때도 인간은 여전히 형식적인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98,북역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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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아프며,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은 다음이라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안과 고독을 느끼고, 그리하여 스스로 깊은 우울의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며, 그것은 원인으로 다가가기가 두려운 우울이므로 치유가 불가능하고, 일생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일을 하며, 당연하게도 미친 듯이 일을 하며, 그런 다음 자신이 해놓은 일이 모두 아무 소용 없는 것으로 판명날 것임을 깨닫게 되고, 어떤 날 이후부터는 오직 종이와 필체의 산더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되고, 그런 자신의 필체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조차 언젠가는 모두 떠날 것이며, 그리하여 남몰래 좌절한 채,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개인적이고 불명확한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에 몰두하기 위해 책상으로 다가가고, 어느날 신문을 펼쳤는데, 다시 친구가 죽고, 친구가 이해할 수 없는 몸짓으로 갑자기 죽고, 함께 차를 마시다가 문득 눈을 들어보니 그 자리에 친구가 없고, 한마디 인사도 남기지 않은 영원한 작별, 비명 없이 베어져나가는 마음, 스스로에게 대답없는 질문을 던지고, 늘 그렇듯이 여행을 하고, 비행기와 기차를 타며, 때로는 대양과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하고, 비행기의 창밖으로 하염없이 시선을 돌리며, 그것과 문득 눈이 마주치고, 자주 반복되는 그 행위로 인해 음울의 정서가 가슴에 쌓여가며, 태양이 비치는 드문 날이면 화분을 발코니에 내다놓고, 때로는 농담을 하고 미소도 지으며, 외국으로 이메일을 쓰고 우체국에서 엽서를 부치며, 명랑한 자리에 초대될 때도 있으며, 그리고 글을 쓰며, 친구를 생각하고, 이미 죽은 친구들과 살아 있는 친구들을, 이미 죽은 친구들과 이제 앞으로 죽게 될 친구들을, 이런저런 약속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전시회나 음악회, 극장을 찾아가고, 무엇보다 책을 읽고, 집에 돌아와서는 일을 시작하기 전 다시 한번 더 창밖을 바라보며, 눈보라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생각하고, 하루종일 일을 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 문득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으나 장거리 전화는 연결되지 않고, 그리고 마침내 어느날, 다시 아프다.(116~117, 올빼미의 없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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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그것은 나에게 철저하게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소리를 가진 하나의 문자에 불과했다. 그것은 어두웠으나, 지나가는 낯선 사람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더욱 심각하게 고백하자면, 사실 온전히 예술이며 문학적인 것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흔히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글로도 썼으나,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어떠할 것이라는 아무런 예감조차 갖지 못했다. 한때 살아 있었다고 우리에게 알려진 누군가가 '진정으로,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이란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결코 돌이킬 수 없음'이란 어떤 성격의 상실과 고통을 의미하는 것인지.(131, 올빼미의 없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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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명이 가고, 그리하여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무덤을 딛고서 모든 젊은 아름다움과 신선하고 달콤한 환희가 활개치며 찾아온다면, 나는 향기로운 봄의 입술에 절대 찬미를 보내지 않겠다. 그 입술이 무엇을 빨아먹고 살이 올랐는지 먼저 생각하게 되리라. 듣고 있는가 베르너, 늘 그렇듯이 나는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맞은편에서 홀연히 솟아나는 지옥의 정원을 보았고, 사람들은 나에게 외르그가 죽었다고 말하며, 외르그는 이제 앞으로 영원히 없게 되는데, 이 없음이란 무엇인가, 없음이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리고 없음이란 도대체 왜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145, 올빼미의 없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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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려 부드러워진 정원의 흙은 발이 푹푹 빠졌으며, 그 위로 무거운 여행가방을 힘겹게 끌면서, 나는 과연 빌라의 외벽이란 곳이 어디일까 사방을 두리번거렸는데, 현관에 켜진 희미한 전등 이외에는 어디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고, 끊임없이 내리는 빗방울이 정원의 흙에 절벅거리며 스며드는 소리만이 무섭도록 크게 들려왔으며, 스무 시간에 걸친 여정을 마친 나는 비를 맞으면서 한동안 침묵한 채 서 있었는데, 이것이 내 집인가, 이것이 내 꿈인가, 혼돈과 동시에 어떤 육체적 피곤과도 비슷한 몽환이 몰려왔기 때문이고, 그것은 장시간의 비행기여행 뒤면 으레 나타나곤 하는 증상으로 시차로 인한 정신의 산란인지 혹은 비행중 과도하게 작용하는 방사선의 영향 때문인지, 이 커다란 빌라에 아무도 살지 않으며, 모든 방들은 비어 있고, 그날 오후 내가 공항에서 몇시간 동안 길을 잃었던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오늘밤 동안 길을 잃을 것인데, 마치 오래전에 꾸었던 꿈속으로 잘못 미끄러져들어온 나의 현재라는 시간처럼, 여기서 길을 잃을 나와 그 나를 지켜보고 있을 나는 잠시 동안 서로 이별할 것이고,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가기도 전에 이미 그 방을 보았으며, 그 공간을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고,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곳에서 일어나거나 내가 하게 될 일들까지도, 절름발이 악사가 들고 다니던 만화경처럼 장면장면 머릿속으로 느리게 지나갔는데, 지나가는 장면들은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라 나중에 등장하는 장면들 사이에 불규칙하게 꺼어들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반복해서 나타났고, 그래서 나는,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으니, 그때의 적막하고도 압도적인, 그러면서 동시에 확신에 찬 몽환은 시간이 지나도 나를 완전히 놓아주지 않았으며, 그날 이후로 나는 머릿속에 잠시 떠올라 나를 가만히 차지한 다음 불현듯 꺼져버리는 비연속적인 상들이 나의 단순한 상상의 산물인지, 아니면 깨어 있는 상태로 꾸는 건조한 꿈인지, 혹은 이미 내가 예전에 보았던 광경이거나 아니면 내가 보았다고 느끼게 될 앞으로의 영상들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176~177, 무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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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직업은 우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직업은 우울하며, 필연적인 우울을 유발한다. 은퇴와 죽음 말고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울.(194, 빠리 거리의 점잖은 입맞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