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잉게보르크 바흐만, 《삼십세》, 문예출판사, 2000.

시월의숲 2011. 1. 10. 23:37

그는 자기 주변을 에워싼 인간들에게 결별을 고하리라. 그리고 가능하면 새로운 인간들에게도 접근하지 않으리라. 그는 이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 수가 없다. 인간들은 그를 마비시키고 그들 나름대로 자기네에게 유리하게만 그를 해석했다. 얼마 동안 한 장소에서 살다보면 사람들은 너무나 여러 모습으로, 소문 속의 모습으로 배회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주장할 권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만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뿐만 아니라 영원히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놓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여기서는, 그가 오래 전부터 붙박고 살아왔던 이곳에서는 그러한 생활을 시작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자유로워질 수 있는 로마에서라면 시도해볼 수 있으리라.

그는 로마에 도착한다. 그리고 일찍이 타인들의 마음에 남겨두었던 자신의 과거 모습에 부딪힌다. 그 모습은 정신병자에게 입히는 구속복같이 그를 억누른다. 그는 화가 나서 날뛰며 저항하고 닥치는 대로 덤비다가는 끝내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사람들은 그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한결 젊었을 적에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간으로 제멋대로 했던 행동이 그 원인이다. 그는 어디를 가나 영원히 자유스러울 수 없으리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으리라.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는 기다린다.(14~15)

 

 

*

 

 

, 온갖 무의식적인 반응과 단련된 의지로 이루어진 한 다발의 묶음인 나, 충동과 본능의 부스러기와 역사의 찌꺼기에 의해 길러지는 나, 한 발을 황야에 두고 다른 한 발로는 영원한 문명의 중심가를 밟고 있는 나. 도저히 관통할 수 없는 나, 각종 소재가 혼합되어 머리칼처럼 뒤엉켜 풀 수 없는, 그런데도 뒤통수의 일격으로 영원히 소멸되어버릴 수도 있는 나, 침묵으로부터 생성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나…… 왜 나는 이 한여름 내내 도취 속에서 파괴를 추구해왔던가? 아니면 도취 속에서 승화를 갈구해왔던가 그것도 나 자신이 하나의 버림받은 악기였음을, 벌써 오래 전에 누구인가 몇 개의 음을 튕겨본 적이 있을 뿐인 버림받은 악기였음을 스스로 외면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그 음을 어쩔 줄 몰라하며 변주하고, 분노에 떨며 나의 흔적을 지닌 한 가락의 음을 만들어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나의 흔적이라니! 흡사 그 무엇이든 간에 나의 흔적을 지니는 것이 무슨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21)

 

 

*

 

 

"편견 인종적 편견, 계급적 편견, 종교적 편견, 그 외의 모든 편견 은 그것이 교양이나 통찰에 의해 해소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치욕으로서 잔존한다. 부정과 억압을 폐지하고, 모든 혹독함을 완화하고, 상황을 하나하나 개선한다 하더라도, 역시 과거의 치욕은 그대로 남는다. 언어의 존속에 의해 잔존하는 비열함은, 곧 언어가 존속하고 있음으로 해서 언제든 다시 가능해지는 것이다."

 

"새로운 언어 없이는 새로운 세계도 없다."(62)

 

 

*

 

 

만약 지금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한 젊은 인간의 얼굴이리라. 또한 그는 자신이 젋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으리라. 사실 훨씬 젊었을 한때에 그는 꽤나 늙은 것처럼 느꼈고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것은 그의 사상과 육체가 너무나 그를 심란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한창 젊었을 때 그는 일찍 죽기를 소원했고, 30세가 되고 싶다고는 조금치도 바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삶을 원하고 있다. 그 당시 그의 머릿속에는 세계를 향해 찍을 수 있는 구두점만이 사방에서 뒤흔들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세계가 등장하는 최초의 문장이 수중에 들어오고 있다. 그 당시에 그는 무엇이든 궁극에까지 생각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도, 자기가 현실 속으로는 이제 겨우 최초의 몇 발자국을 들여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바로 그 현실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궁극에까지 생각하게 허용하지 않고, 여전히 숱한 일들을 보류해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67)

 

 

*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일어서서 걸으라. 그대의 뼈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으니.(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