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3》, 휴머니스트, 2004.

시월의숲 2012. 3. 6. 00:12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 꽃의 모양과 색깔을 즐길 때, 우리는 그 꽃을 '존재자'로 대하는 것이다. 반면 시인의 체험은 분명 꽃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를 전율에 빠뜨린 것은 도대체 꽃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바로 '존재'의 체험이다. 과거의 예술은 존재자를 모방하려 했다. 하지만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모방이나 재현에 있는게 아니다. 예술의 진리는 무엇보다도 사건을 일으키는 데에 있다. 즉 모든 존재자의 아래에 묻혀 잊혀진 존재의 체험을 일으켜, 우리를 존재망각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에 있다.(113~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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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이는 현대 예술만이 아니라 실은 모든 예술에 해당된다. 고흐의 작품이 어디 추상화였던가?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할 때조차 예술은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게 된다. 가령 터너의 풍경화를 생각해보라. 터너는 눈에 보이는 안개를 재현함으로써 동시에 그때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안개의 아름다움을 보게 했다. 이렇게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한다'. 그뿐인가? 그 아름다움을 얻게 되자, 거추장스럽기만 했던 안개가 영국인들 삶에 비로소 참되게 자리잡는다. 이렇게 예술은 없던 것을 '있게 한다'.(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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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예술은 대중과 '코드'를 공유했다. 현대 예술은 일부러 그 공동의 '코드'를 깨고,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오직 자기만의 '코드'를 만들어낸다. 현대 예술이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왜 현대 예술은 사회에 널리 공유되는 코드를 거부하고 굳이 이해되지 않으려 하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예술은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존재로 남을 수 있다.……예술은 끝없이 자신을 혁신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상투적 코드 안에 가두려는 문화산업의 추적을 피해 끝없이 탈주하며,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이성의 타자로 남으려 한다. 자연을 전혀 닮지 않으면서도 현대 예술은 이렇게 자연을 미메시스한다.(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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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탈주는 혁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일성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코드를 깨고, 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아방가르드는 이렇게 낡은 '아름다움' 대신에 형식의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래서 이제 예술은 내용 없는 형식이 된다. 하지만 내용이 없다고 진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진리는 형식을 '통해' 전달되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 '안에' 침전되는 소리 없는 목소리로 존재한다. 그 목소리를 들으려면 그것이 침전된 형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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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쥐었다 펴보라. 그래 봤자 손이다. 이제 불을 끄고, 촛불을 켜라. 그리고 손가락을 펴서 촛불에 갖다 대보라. 그럼 벽의 손의 그림자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손이 손이라는 사실이 뭐 그리 대단한가? 그러니 이제 손의 각도와 모양을 바꾸어보라. 그러면 당신의 손은 곧 개가 되어 짖기도 하고, 토끼가 되어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하고, 독수리가 되어 날개를 퍼덕이기도 할 것이다. 늘 보고 무심코 지나치던 손 안에 이렇게 많은 형상이 들어 있으리라 누가 미처 알았겠는가.……마그리트가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시뮬라르크의 놀이를 통해 상투적 시각이 무심코 보아 넘기는 대상 속에 감추어진 무한한 형상들을 펼쳐 보여준다. 혹시 벽에 비친 속의 그림자가 개나 토끼나 독수리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게 당신을 화나게 하는가? 그토록 진지한 당신은 어쩔 수 없는 플라톤주의자다. 반대로 하나의 손에서 온갖 다양한 형상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는가? 그렇게 천진난만한 당신은 영락없는 니체주의자다.(214~2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