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시월의숲 2013. 5. 27. 23:31

'현실'이라는 판타지에 의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충동의 섬뜩한 '실재'(the Real)를 간신히 외면한 채 그럭저럭 살아간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몰라야 할 어떤 진실이 있고, 현실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말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야 할 어떤 말들이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고 제니 홀저는 말했지만(이것은 '현실'의 편에서 하는 말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프랑수아즈 사강은 말했다(이것은 실재의 편에서 하는 말이다). 윤리가 발생하는 지점은 후자다.(152~153쪽)

 

 

*

 

 

 

시는 하찮은 것이다. 시가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시는 하찮은 것이지만 다른 대단한 것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주체들이 앓고 있는 증상들을 언어라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을 통해 표현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시는 가장 근본주의적으로 하찮고 가장 진실하게 사소한 그 무엇이다. 도착적이고 반(反)고백적이며 환상적이고 비(非)계몽적인 이들의 시는 불투명한 우리 시대가 낳은 가장 투명한 증상들이다. 물론 진실은 언제나 건강한 자들이 아니라 앓는 자들의 편에 있다.(230쪽)

 

 

*

 

 

문법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시는 "올바른 문법"을 박살내도 좋다는 라이선스가 부여돼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다. 아니다, 문제는 문법 그 자체가 아니다. 문법 안에서건 밖에서건 '시적인 것'에 도달하는 일이다. 만약 필요하다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문법도 팔아야 한다.……누군가 있다. 여하튼 있을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저런 부류는 도대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존재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이만이 그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 것이다. '당위성'을 먼저 내세우는 이에게 그 존재는 한갖 '우연성'의 얼룩으로만 보일 것이다.(325~326쪽)

 

 

*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너를 어떤 느낌으로 적시는지를 모른다. 너를 관통하는 그 모든 느낌들을 나는 장악하지 못한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전부일지 모를 그 느낌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저 '너'라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일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에게 필요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느낌을 너에게 제공할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능력이다.(347~348쪽)

 

 

*

 

 

비밀을 다룰 줄 아는 이가 시인이다. 비밀을 잘 다루는 일은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감추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비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된다. 완벽하게 단속된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 얼굴의 반만을 드러낸 여인처럼 절반만 말해진 비밀이 진짜 비밀이다. 비밀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되 그 비밀의 내용을 요령껏 감출 때 비밀은 매혹적인 것이 된다. 시가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독자는 시의 인질이 된다. 말해지지 않은 나머지 절반이 내 욕망의 원인이 되고, 그때 절반은 때로 전체보다 더 커진다. (419쪽)

 

 

*

 

 

서정은 언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인식론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겸허할 때다. 타자를 안다고 말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하지 않는 시가 그렇지 않은 시보다 아름다움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정시는 가장 왜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5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