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한강, 《노랑무늬영원》, 문학과지성사, 2012.

시월의숲 2013. 3. 19. 19:12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얼핏 어두워진다. 거울을 통해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회복하는 인간」, 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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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요즘 프랙탈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깜짝 놀랐어. 우리 몸속 혈관들이 뻗어 나가는 선, 하천들이 지류를 만들며 뻗어가는 선, 나무들이 하늘로 가지를 뻗어 올리는 선 들이 모두 닮아 있다니. 지하철 입구에서 빠져나오는 인파의 움직임도 비슷한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그렇다면, 혹시 사람의 인생도 그럴까? 공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이 어떤 수학적인 선…… 기하학적으로 추측 가능한 선들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올 때마다 생각하게 돼. 함께 수학적인 곡선을 그리며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과 내가 비슷한 몸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비슷한 곡선으로 뻐어간 핏줄들 속에 거의 같은 온도의 피가 흐르고, 세찬 심장의 압력으로 그게 순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들은 결코 내 삶의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고, 나 역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함께 그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에우로파」, 7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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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받지 마.(「밝아지기 전에」, 126~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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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안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 안의 죽은 부분을 되살려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부분은 영원히 죽었으므로. 그것을 송두리째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노랑무늬영원」, 296쪽)